I. 서 론
콩은 오곡(五穀)의 하나로서 선사시대부터 인류의 식재료로 중시되어 왔고, 이후 콩을 이용한 다양한 식품이 개발되면서 동아시아 식생활의 기본 구조를 형성해 왔다. 오늘날 콩은 대표적인 식물성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건강식품의 중심에 있으며, 대체육⋅단백질 소재⋅기능성 식품 등 푸드테크의 핵심 원료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적 가치와 대중적 친숙함에 비해, “콩의 기원지(起源地)가 어디인가”라는 문제는 의외로 역사학적 검토가 빈약하고, 콩이 어떤 방식으로 ‘가공(加工)⋅저장(貯藏)⋅유통(流通)’의 기술 체계를 만나 하나의 물질문명(物質文明)으로 전환되었는가에 대한 장기적 서술도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다.
그간 콩 연구는 주로 자연과학, 즉 농학⋅식품학⋅생물학의 영역에서 품종⋅성분⋅재배 기술⋅가공 공정의 측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성과는 콩의 생물학적 특성과 이용 가능성을 밝히는 데 필수적이지만, 콩이 사회 속에서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발효(發酵)’를 만나 장기 저장이 가능한 단백질 자원이 되었는지, 그 결과 동아시아의 식생활과 농업 구조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와 만주(滿洲)를 포함한 중국 동북(東北) 지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역사학의 관점에서 콩의 기원과 전파, 생산과 가공 기술의 변천을 추적하고, 콩이 시공(時空)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문명 자원으로 확장⋅정착했는지를 논증하고자 한다.
특히 본고는 콩의 기원을 단순한 재배의 시작이나 유물의 연대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콩이 언제⋅어디에서 ‘발효 가능한 대두(大豆)’로 성숙하여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는가에 초점을 둔다. 이를 위해 첫째, 콩의 기원 논쟁에서 ‘야생콩(野生豆)’의 분포만으로는 결정적 기준이 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기원 논증의 기준을 “발효 가능한 대두의 성숙과 그 사회적 지속”으로 재설정한다. 둘째, 중국 내지(內地)에서 콩 이용이 잎(藿)과 사료(飼料) 중심에서 장(醬)⋅시(豉) 중심으로 전환되는 시기와 계기를 ‘융숙(戎菽)’의 도입과 결부해 설명하고, 그 전환의 의미를 콩의 명칭 변화(菽→豆)와 용도 변화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검토한다.
나아가 본고에서는 동북—고조선 문화권에서 왜 장⋅시와 같은 발효식품이 조기에 성숙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는가라는 구조적 문제를 함께 다룬다. 즉, 염장(鹽藏)⋅저장 기술과 발효식품에 대한 생활 경험, 그리고 젓갈(鱁鮧)로 대표되는 동이계 발효 전통이 어떻게 콩 발효로 전이⋅확장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이러한 조건 위에서 융숙은 후대의 고려두(高麗豆)⋅책성지시(柵城之豉)로 재현되고, 고구려 말장(末醬)은 일본 미소(味噌)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다시 고려⋅조선을 거쳐 장류 문화로 심화⋅계승된다.
아울러 대두 문명이 장⋅시 같은 발효식품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콩의 용도는 두부⋅콩나물⋅콩기름⋅깻묵으로 확장되었고, 더 나아가 사료⋅비료⋅지력 회복⋅간작(間作) 체계 속에서 농업 생산력의 핵심 자원으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다층적 활용이 고려⋅조선 시기에도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한반도가 단순한 ‘콩 재배 지역’이 아니라 대두 문명이 장기적으로 심화⋅재생산된 공간이었음을 보여 준다.
요컨대 본고는 콩의 기원 문제를 “가장 이른 유물의 존재”가 아니라, 발효 기술과 결합한 대두 문명이 어디에서 구조적으로 성숙하고 지속되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고고학 자료, 문헌 기록, 명칭 변화와 식품 기술, 유통과 제도 운영의 흔적을 종합하여, 동북—한반도권이 ‘발효 가능한 대두 문명’의 중심축으로 기능했음을 단계적으로 논증하고자 한다.
II. 본 론
1. 콩 기원 논쟁의 재정립: 야생콩에서 ‘발효 가능한 대두’의 출현
콩의 기원 문제는 중국⋅한반도⋅일본⋅시베리아⋅인도 등 다양한 지역이 기원지로 거론되면서 논쟁이 복잡하게 전개되어 왔다. 이 논쟁이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야생콩’이 특정 지역에만 고유하게 분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 상태의 콩은 기후⋅토양 조건이 맞는 곳이면 넓게 분포할 수 있고, 특히 야생성이 강한 식물일수록 “그 출토 지역이 곧 기원지”라는 주장을 누구나 제기할 수 있다. 더구나 재배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야생적 기능은 약화되고, 후대의 형태를 그대로 기원 단계에 투사하는 것은 위험하다. 또한 야생콩의 이동은 동물이나 자연 확산만으로 설명되기 어렵고, 인류의 채집⋅교역⋅이주에 의해 인위적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야생콩의 존재 여부”만으로 특정 지역을 콩의 기원지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본고는 기원 논쟁의 기준을 재설정한다. 즉, 기원 논쟁은 “야생콩이 어디에 있었는가?”가 아니라, “발효 가능한 대두(大豆)가 어디에서 성숙했고, 그 성숙이 사회적으로 지속⋅제도화되었는가”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콩은 단지 삶아 먹거나 잎을 국거리로 이용하는 1차 단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콩의 소비는 대개 ‘숙반곽갱(菽飯藿羹)’단계, ‘두죽(豆粥)과 두병(豆餠)’단계와 ‘두시(豆豉), 두장(豆醬) 및 두부, 두유(豆油)’의 단계를 거친다(Choi 2010). 콩이 동아시아 식생활의 핵심이 된 결정적 계기는 장(醬)⋅시(豉)⋅된장 등 발효식품의 등장과 확산이었다. 발효식품은 단지 ‘조리법’이 아니라, 미생물의 작동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생활 기술이며, 종자의 성질⋅용기(容器)⋅소금⋅기후⋅노동⋅경험 지식이 결합해야 성립한다. 따라서 어느 지역이 콩의 기원지인가를 가늠할 때, 발효식품의 조기 성립과 장기 계승을 중요한 지표로 삼아야 한다.
중국이 콩 기원지로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유물과 문헌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콩 흔적이 보고되고, 『Shijing(詩經)』(Anonymous Zhou period) 같은 고대 문헌에도 숙(菽)이 등장한다.
『시경(詩經)』「Binfeng⋅qiyue(豳風⋅七月)」, “七月亨葵及菽”, “九月築場圃, 十月納禾稼. 黍稷重穋, 禾麻菽麥.”; 『시경(詩經)』「Xiaoya⋅Jienanshanzhishi⋅Xiaowan(小雅⋅節南山之什⋅小宛)」, “中原有菽, 庶民采之.”; 『시경(詩經)』「Xiaoya⋅Gufengzhishi⋅Xiaoming(小雅⋅穀風之什⋅小明)」, “采蕭穫菽”; 『시경(詩經)』「Xiaoya⋅Yuzaozhishi⋅Caishu(小雅⋅魚藻之什⋅采菽)」, “采菽采菽, 筐之筥之”, 『시경(詩經)』「Daya⋅shengminzhishi⋅Shengmin (大雅⋅生民之什⋅生民)」, “蓺之荏菽, 荏菽旆旆”; 『시경(詩經)』「Lusong⋅Bigong(魯頌⋅閟宮)」, “黍稷重穋, 稙穉菽麥.”
위 『Shijing (詩經)』「Binfeng⋅qiyue (豳風⋅七月)」의 ‘숙(菽)’과 「Daya⋅shengminzhishi⋅Shengmin (大雅⋅生民之什⋅生民)」의 “예지임숙(蓺之荏菽), 임숙패패(荏菽旆旆)”를 보면, 이미 주(周)대에 숙(菽)⋅임숙(荏菽)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채집(采之)과 ‘임숙패패’의 묘사가 “콩잎이 무성해 깃발처럼 흔들린다.”라는 이미지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대목은 콩이 이미 재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만, 콩 이용의 중심이 ‘열매(種實)’가 아니라 잎(藿)과 관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동시에 시사한다. 『ShiJi (史記)』(Sima BC.2C) 「Biography of Li Si (李斯列傳)」에 보이는 “자려지식(粢糲之食), 여곽지갱(藜藿之羹)” 또한 마찬가지다. ‘곽(藿)’은 콩잎을 가리키는 전통적 표현으로 읽힐 수 있으며, 이 문장 전체가 재난 시기의 검소한 식생활을 말한다는 점에서, 당시 콩은 주로 잎과 구황작물의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중국에 콩이 일찍부터 존재했다.”라는 사실과 “중국이 발효 가능한 대두 문명의 기원지”라는 결론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콩이 문명사적 위상을 갖는 것은 단순 존재가 아니라, 콩이 ‘단백질 저장 기술’로서 발효를 만나고, 그 결과 장⋅시 같은 식품 체계가 생활 속에 정착할 때이다. 다시 말해 “콩이 있었다.”라는 사실은 출발점일 뿐이며, “콩이 발효를 통해 저장 가능한 단백질 자원으로 전환되었다.”라는 지점에서 비로소 문명사적 분기점이 형성된다. 따라서 만일 중국 내지에서 초기의 숙(菽)이 잎과 구황 중심으로 소비되고, 장(醬: 콩장)⋅시(豉: 메주) 체계가 후대에 형성되었다면, 그 장⋅시 체계의 ‘촉발 요인’이 무엇이며 어떤 지역의 콩 계통이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를 묻는 것이 타당하다. 본고는 그 촉발 요인을 동북 지역의 융숙(戎菽)에서 찾는다.
한반도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환경적 요인도 이 관점에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도 제시하듯, 콩은 북위 35~40도 대에서 단백질 함량이 적합하다는 점(Kwon et al. 1988; Zhung 1999), 같은 위도 조건에서는 강우량이 풍부하고 다양한 야생콩이 채집되는 곳이 콩의 순화(馴化)⋅진화(進化)에 유리한 자연조건을 이룬다. 주목되는 것은 한반도 출토 야생 콩의 장폭비(長寬比)가 중국 내지와 다르게 원형에 가깝고(청동기시대 1.1~1.2 전후), 이는 오늘날 메주콩과 흡사하다는 관찰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다는 점이다(Choi 2024). 이 사실은 단순한 “형태의 차이”가 아니라, 발효식품에 적합한 콩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연 선택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Choi 2024:103-116). 발효는 콩의 조직⋅흡수성⋅균의 부착성⋅가열 후 성형 안정성 등과 관련되는데, 이러한 성질은 품종 선택의 방향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결국 본고가 강조하는 한반도 기원설의 결정적 근거는 단순 생태 조건이나 “야생 콩이 존재했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콩이 발효식품으로 조기에 발전하고, 그것이 동북—한반도에서 특화⋅제도화⋅확산되었다.”라는 문명사적 연속성에 있다는 점이다.
2. 융숙(戎菽) 도입 이후의 전환: 중국 내지의 확산 시기와 한반도의 제도화(制度化) 시기
콩 문명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장면은, 중국 내지에서 콩 이용이 잎⋅가축 사료 중심에서 장⋅시 중심으로 전환되는 시기와 그 계기이다. 본고는 이 전환을 “융숙(戎菽)의 도입”과 결부해 설명한다. 핵심 문헌은 『Guanzi (管子)』「Jie (戒)」(Guan BC.7-1C)의 “북쪽으로 가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그곳에서 동총(冬葱)과 융숙(戎菽)을 가져와 천하에 보급했다(北伐山戎, 出冬葱與戎菽, 布之天下).”라는 내용이다. 산융 정벌을 계기로 동북 지역의 특산물인 융숙이 중국 천하에 퍼졌다는 이 문장은, 중원에 이미 숙(菽), 임숙(荏菽)이 존재했음에도 ‘융숙’이 별도 명칭으로 강조된다는 점에서 결정적이다. 다시 말해, 융숙은 기존 중국의 숙(菽)과 구별되는 ‘특별한 콩’으로 인식되었고, 그 특별함이 널리 보급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천하에 공급”하는 대상이 되었다.
동북지역 융숙의 존재는 일찍이 기원전 11세기의 『Yizhoushu (逸周書)』 「WanghuiJie (王會解)」(anonymous 先秦-前漢)의 ‘산융숙(山戎菽)’에서도 확인된다. 서주 성왕(成王) 대의 특산 공납으로 기록된 산융의 융숙은, 동북 지역의 콩이 일찍부터 ‘특산’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산융의 위치는 『Hanshu (漢書)』(Ban 105) 卷94 「Biography of the Xiongnu(匈奴傳上)」의 기사에 의하면, “산융월연이벌제(山戎越燕而伐齊)…제환공북벌산융(齊桓公北伐山戎)”에서 연(燕) 북쪽, 즉 중국 동북으로 비정될 수 있다(“山戎越燕而伐齊, 齊釐公與戰于齊郊. 後四十四年, 而山戎伐燕. 燕告急齊, 齊桓公北伐山戎, 山戎走.”). 이곳은 고고학적으로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과 고인돌 문화가 분포되어 있는 고조선의 중요한 무대였으며, 중원과는 다른 문화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융숙은 무엇이 달랐는가. 유사한 위치에서 등장한 후대의 고려두와 대비해 볼 때, “융숙은 기존 중국 콩과 종자(種子)가 다르고, 장⋅시를 만들 수 있는 대두(大豆)적 성질을 지녔다.”라는 점이 핵심이다. 기존의 숙(菽)이 주로 잎(藿)으로 국거리에 이용되었다면, 융숙은 고단백⋅저지방이며 종피가 두껍고 조직이 단단하여 미생물이 잘 붙고, 메주 성형 과정에서 곰팡이가 침투하기 유리하다. 반면 원시 숙(菽)은 발효 과정에서 부패하거나 냄새가 나고 풍미가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 차이가 “왜 이미 임숙(荏菽)이 존재했는데도 융숙을 재전파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구조적 답이 된다. 즉 융숙의 전파는 “콩의 전파”가 아니라, “발효 가능한 대두의 전파”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전환은 중국 내지의 문헌에서 단계적으로 포착된다. 『Wushierbingfang (prescriptions of fifty-two diseases) (五十二病方)』(anonymous 春秋戰國)에서 숙장(菽醬)이 약용⋅식용으로 등장하는 대목은 발효식품이 생활 속에서 의미 있는 수준으로 나타나는 초기 징후로 읽힌다(“菽醬之滓半”(簡242), 『Wushierbingfangzhubushi (Additional interpretation for prescriptions of fifty-two diseases) (五十二病方注補釋』牡痔; 같은 책, “入八完(丸) 叔(菽)醬中, 以食.”). 또한 전한 원제(元帝) 때 사유(史游)의 『Jijiupian (急就篇)』(Shi BC.1C)에 “염시(鹽豉)”와 “장(醬)”이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은 콩을 이용한 장(醬)과 시(豉)가 분리⋅정착하는 과정이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전국시대 장(醬)의 대표성이 육장(肉醬)⋅어장(魚醬) 같은 동물성 젓갈(醢)에서 콩장으로 이동하는 변화 역시 중요하다. 『ShuowenJiezi (說文解字)』(Xu 2C) 에서 “장(醬)은 젓갈(醢)이다”라고 정의한 것은 고대 중국에서 장이 본래 젓갈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콩장(菽醬)이 등장하고 확산되면서 화북지역 장의 중심은 점차 재료 구입이 용이한 식물성 발효물로 이동한다(Choi 2012; Choi 2022).
또 하나 결정적 변화는 명칭의 변화이다. 사료상 콩의 명칭이 진한시대를 거치면서 숙(菽)에서 두(豆)로 변모하는 흐름은 용도 변화와 결부된다. 선진(先秦) 시기 숙(菽)에서 전국 말 『Lüshichunqiu (呂氏春秋)』(Lü et al. BC.239)의 대숙(大菽)⋅소숙(小菽)으로 구분되다, 다시 한대 『Fanshengzhishu (氾勝之書)』(Fan Late Western Han) 단계에 대두(大豆)⋅소두(小豆)로 바뀌는 과정은 “용도가 다른 콩의 출현”을 반영한다. 즉, 단지 곡물 분류의 변화가 아니라, 콩이 생활 속에서 수행하는 기능이 달라졌기 때문에 언어적 범주도 재편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대두(大豆)”라는 범주가 단지 크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효⋅저장⋅가공에 적합한 콩의 사회적 중요성이 커졌음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본고가 더 강조하는 것은 “중국 내지(內地)의 확산 시기”보다 “한반도의 제도화 시기”이다. 중국 내지에서 장(醬)⋅시(豉)가 확산되는 흐름이 확인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된장형 말장(末醬)⋅청장(淸醬) 같은 체계적 장류의 제도화로 이어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중국은 알메주(豉) 중심, 시즙(豉汁) 중심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강하고, 말도(末都)⋅말장 계열의 된장형 발효물이 내지에서 지속적으로 계승⋅정착하지 못한 정황이 보이며, 이후의 기록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자리 잡지 못했음을 뜻한다(Choi 2024). 반면 한반도에서는 말장과 청장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명확한 범주로 등장하고, 이후 고려⋅조선 시기에 제도화되어 문헌적 체계로 심화된다. 이것이 바로 “기원 논증의 무게 중심”이 한반도 쪽으로 이동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 대비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확산’과 ‘제도화’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확산은 특정 식품이 알려지고 이용되는 단계이지만, 제도화는 그것이 사회적 기술로 굳어져 반복적으로 재생산되고, 명칭⋅제조법⋅용도⋅유통이 안정된 규칙으로 운영되는 단계이다. 중국 내지의 숙장⋅염시⋅장 기록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이 ‘제도화된 분류 체계’로서 장류의 기능을 세밀하게 분화한 모습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반면 조선의 장류는 비록 전대(前代)의 기록은 소략하지만, 제조법⋅용도⋅명칭 구분이 뚜렷하고, 법령⋅실록⋅생활서에까지 폭넓게 나타나 사회적 자원으로 운용된다. 이 대비는 한반도 대두 문명이 “단지 먼저 있었다”가 아니라 “더 깊게 체계화되었다”라는 논증으로 이어진다.
3. 한반도⋅만주 대두 발효 문명의 성숙과 계승
한반도 대두 기원설의 결정적 강점은, 동북—한반도에서의 대두가 단절되지 않고 후대까지 지속적으로 재현되며 발효식품의 계보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 계보는 “융숙→고려두⋅책성지시(柵城之豉)→고구려 말장(末醬)→일본 미소(味噌)와 고려⋅조선 계승”이라는 연계 사슬로 정리될 수 있다. 다만 이 사슬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단순히 ‘연결고리’만 제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 하필 동북—한반도에서 장⋅시 문화가 조기에 성숙할 수 있었는지, 즉 “발달 요인”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본 장은 두 개의 절을 두어, 첫째 절에서는 “발달 요인”을 구조적으로 설명하고, 둘째 절에서는 “계보와 전파”를 문헌과 정황 증거로 촘촘히 정리한다.
1) 한반도⋅만주에서 장⋅시(醬豉) 문화가 발달한 구조적 요인
동북—한반도권에서 장⋅시 문화가 발달한 이유를 단일 요인으로 환원하기는 어렵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서로 결합되면서 “발효 가능한 대두”가 생활 속 기술로 정착할 여지가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저장⋅발효를 가능하게 하는 용기(容器) 기술과 생활 기술의 축적이다. 장⋅시는 ‘만드는 법’뿐 아니라 ‘저장하는 법’이 함께 갖추어져야 안정적으로 전승된다. 콩 발효는 일정 기간 미생물 작용을 유지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내용물이 쉽게 변질되지 않는 용기와 저장 환경이 필요하다. 동북—한반도권에서 장기간 사용된 옹(甕)과 항아리류의 생활 습속은 발효식품의 안정적 재생산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내지에서도 물론 옹기⋅토기가 발달했으나, 지역과 시기에 따라 저장성과 소성 온도의 차이가 컸고, 누수나 오염을 막기 위한 추가 처리가 불가피했다. 실제 6세기 『Qiminyaoshu (齊民要術)』(Jia 6C)에는 항아리의 누수를 막기 위해 도옹(塗壅: 기름막 형성) 처리를 역설하였는데, 한반도에서는 가야토기에서 보듯 환원염(還元焰) 소성으로 토기 표면에 유리질 막이 형성되어 저장용 항아리 문화가 생활 속에서 특히 두드러졌으며, 이는 장⋅시 문화의 지속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오늘날 장인(匠人)의 증언은 분명 학문적인 검증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하지만 가야토기 재현 장인과 옹기 장인의 증언에 의하면, 환원염 소성 과정에 연훈(烟熏) 처리하면 토기의 강도와 자화(瓷化)가 높아진다고 한다. 특히 연훈 처리할 때 태토 속의 광물질 성분뿐만 아니라 연기를 먹이는 과정에 사용된 연료가 소나무, 대나무 및 갈대 인지에 따라 연기의 색깔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토기에 입히는 빛깔도 달라진다고 한다(Choi. 2019c.).
둘째, 염(鹽) 자원과 염장(鹽藏) 문화의 발달이다. 장⋅시에서 소금은 단순한 간 맞추기 재료가 아니라, 부패균을 억제하고 발효를 조절하는 핵심 재료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개펄이 발달한 서해안은 한반도의 소금 생산과 유통이 상대적으로 유리했고, 이는 장⋅시가 가정 단위의 음식에서 나아가 일정 수준의 교환⋅유통까지 감당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에 남해안의 젓갈이 개경으로 공급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Choi. 2012:217-220). 또한 젓갈(醢)⋅염장 식품의 문화가 발달한 환경에서는, “미생물 작용을 다루는 경험 지식”이 축적되기 쉬우며, 이러한 지식이 젓갈과 콩 발효를 견인하여 상호 확장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셋째로, 한반도⋅만주(발해⋅요동) 권역에서 장⋅시가 조기에 성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이(東夷) 계통의 염장⋅발효 문화, 특히 내장젓갈(鱁鮧) 전통이 놓여 있다. 『Qiminyaoshu(齊民要術)』의 “Preparation of Zhuyi (Fermented Fish)(作鱁鮧法)” 즉, 한 무제(武帝)가 동이를 추격해 해변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 묻어 저장한 생선 내장 젓갈에서 강한 향기가 올라왔고, 이를 ‘동이 정복 과정에서 발견한 별미’로 인식하여 축이(鱁鮧)라 명명했다는 서술은, 최소한 기원전 2세기 무렵 동북 해안 동이(東夷) 사회에 ‘염장⋅밀봉⋅저장’으로 성립하는 발효식품 기술이 존재했음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 젓갈은 단순 조리법이 아니라, 내장을 씻어 소금만 치고 용기에 밀봉해 두는 방식처럼 미생물 작용을 일정하게 관리하는 생활 기술에 속한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한반도에서는 다양한 해수어의 내장⋅어란을 소금만으로 담근 젓갈을 여전히 즐겨 먹고 널리 제조하는 반면, 중국에서는 내장젓갈을 일상적으로 소비⋅재생산하는 전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동북—한반도권에서 성립한 발효식품의 경험 지식이 단절되지 않고 생활 속에 두텁게 축적⋅재생산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강한 정황이며, 장⋅시(醬豉) 문화의 성숙을 상호 견인하는 문화적 토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요컨대 이 권역에서 장⋅시가 발달한 것은 ‘콩 발효’가 돌연 출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젓갈을 통해 이미 형성되어 있던 염장⋅저장⋅발효의 기술 감각과 기호가 콩 발효(장⋅시)로 확장⋅전이될 수 있었던 조건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넷째로, 이러한 발효 문화의 토대 위에서 장⋅시는 동북—한반도권의 생활 구조 속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수확 이후와 겨울철의 저장식품 마련이라는 계절노동의 리듬, 곡물 위주 식단에서 감칠맛⋅단백질을 보충하는 저장 자원의 지속적 수요, 그리고 연해⋅하천 교통망을 통한 교류의 편의성은 장⋅시를 단지 ‘음식’이 아니라 생활필수품이자 교환 가능한 재화로 만들었다. 이 점은 후대 문헌에서 “책성지시(柵城之豉)”, “고구려장[高麗醬]”처럼 장⋅시가 ‘표지화된 특산’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며, 고려시대 마도(馬島) 목간(木簡)에서 보듯 전라도 남쪽 해안지역에서 생산된 젓갈을 배편으로 개경(開京)까지 운송했던 사실도 볼 수 있다(Choi 2022).
이상을 종합하면, 동북—한반도권의 장⋅시 문화는 우연한 발명이 아니라, (1) 축이(鱁鮧)로 대표되는 동이계 염장 발효 전통, (2) 염⋅용기⋅노동 리듬이 결합된 저장식품 생산의 생활 기술, (3) 수요와 교류가 뒷받침한 지속적 재생산 구조의 결합 위에서 성숙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조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다음 절에서 살필 “융숙→고려두⋅책성지시→고구려 말장→미소(味噌)와 고려⋅조선의 말장”의 연속 사슬 역시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고, 나아가 한반도 대두 발효 문명의 ‘지속성과 심화’라는 본고의 결론으로 연결될 수 있다.
2) 동북—한반도 대두 발효 문명의 계보
먼저 융숙(戎菽)의 출발점은 앞서 본 『Guanzi (管子)』(Guan BC.7-1C)의 기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융숙이 천하에 퍼졌다(布之天下).”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바가 단순한 품종 교환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융숙은 중원 사회에서 실질적 가치가 있었고, 그 가치가 기존 숙(菽)과의 차별성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융숙이 장⋅시 제조에 적합한 대두 계통이었다면, 융숙의 전파는 곧 콩 이용 체계의 전환을 동반한다. 이때 동북 지역이 단순 공급지에 머문 것이 아니라, 발효식품 기술과 결부된 “대두 문명의 원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원류가 후대에 어떻게 재현되는가를 보여주는 표지가 바로 고려두(高麗豆)이다. 국가명+두(豆)라는 표기는 중국 내지의 일반 대두와 구별되는 지역 특산 대두의 존재를 암시한다. ‘고려두’는 단순한 지리적 명칭이 아니라, “그 지역 대두가 특별하다”라는 사회적 인식의 결과이며, 이 특별함은 곧 발효식품 제조에 적합한 메주콩 계통과 연결될 수 있다. 한 지역의 콩이 국가(지역) 이름으로 표지화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단순 소비재가 아니라 기술과 결합된 ‘기능적 자원’으로 인식되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더해 『XinTangshu (新唐書)』(Ouyang & Song, 1060) 「beidi (北狄)⋅Balhae (渤海)」에 보이는 발해의 “책성지시(柵城之豉)”는 고려두의 계보를 잇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책성의 시(豉)가 특산품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동북 지역이 단지 대두 생산지였을 뿐 아니라 발효식품 생산지로서도 명확히 표지화되었음을 뜻한다. 즉 융숙이 출현한 동북—한반도 권역은 후대에도 장(醬)⋅시(豉) 생산의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외부 세계도 그것을 특산으로 인식했다. 이 한 줄의 기록은, 동북권이 메주콩과 장시 특화지였음을 외부가 인정한 흔적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이제 고구려 말장(末醬)의 문제로 나아가면, 한반도 기원설의 논증은 더욱 구체화된다. 『Qiminyaoshu (齊民要術)』권8「Soybean Paste Making (作醬法)」의 “최식왈(崔寔曰)…이쇄두작말도(以碎豆作末都), 지육칠월지교(至六月七月之交), 분이장과(分以藏瓜), 가작어장(可作魚醬).”은 콩을 부수어 만든 말도(末都: 醬)가 존재했음을 말한다. 특히 말도 속에 외(瓜)를 박아 저장했다는 대목은 말도가 된장형 저장물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문제는 이러한 말도⋅말장 계열의 된장형 발효물이 중국 내지에서 ‘주류 전통’으로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는가 하는 점인데, 기록상에 더 이상 보이지 않은 것을 보면 정황상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중국 내지는 알메주(豉)와 시즙(豉汁) 중심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강해, 말도형 된장 전통은 내지에서 제대로 된 위치를 점하지 못한 듯하다. 중국 내지에서 말장 계열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말장이 내지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주류가 아니라 동북—한반도 발효 문화의 지역적 특질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말장 계보의 국경을 넘는 확산은 일본 자료에서 가장 분명해진다. 『Womingleijuchao (倭名類聚抄)』(Minamoto 10C)에 “양씨한어초운(楊氏漢語抄云), 고려장(高麗醤)(소주: 미소[未噌] …속용미장(俗用味醤)”이라는 대목은, 7세기 말 일본의 미소(味噌)가 고구려 말장(高麗醤)에서 유래했음을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기록의 의미는 대단히 크다. 미소는 일본 식문화의 핵심인데, 그 기원을 ‘고려장’으로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신 제사(神祇) 공어물(供御物)에 장(醤)이나 말장(末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관찰은, 그것이 토산물이 아니라 외래품이었을 가능성을 높인다(Hatanaka 2017; Hatanaka 2019; Hatanaka 2025). 말장이 불교 전파와 궤를 같이한다는 정황 역시, 국가 간 문화 교류 속에서 장류 기술이 이동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일본으로 확산된 말장 계보는 한반도 내부에서도 단절되지 않는다. 말장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태안(泰安) 해저 목간(木簡)에서도 그 계승이 확인된다.
태안 마도(馬島): 0810-G16 목간, “戊辰二月十九日□□□□ □□崔光□宅上□□□□□各田出粟拾石木麥, ∨ 參石末醬貳石各入拾伍斗印, (椋)□竹山縣□□尹 押.”; 태안 마도: 1026-좌외판4-2 죽간, “∨ 軍白□戶付竹山縣田出末醬一石入卄斗.”; 태안 마도2-22, “□□同正李(作均)宅上田出末醬壹石各入拾伍斗.”
위 사료와 같이 고려시대에도 말장(末醬)이란 단어가 다수 등장한다. 더구나 『Koryŏsa (高麗史)』(Jeong et al. 1451) 문종 대의 기록에 등장하는 ‘말장곡(末醬斛)’은 말장이 용량 단위로 계량되는 유통 재화였음을 보여 준다. 무게가 아닌 부피(斛)로 측정된다는 것은, 말장이 단지 고체 메주만을 의미하지 않고 액상 또는 반액체 상태의 장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것은 말장 전통이 생활 속에서 실질적으로 소비⋅유통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고구려 말장→고려 말장”의 계승을 제도적 차원에서 뒷받침한다.
나아가 중국 문헌 속 ‘외국 유입’의 흔적도 이 계보를 지지한다. 서진(西晉) 『Bowuzhi (博物志)』(Zhang 3C)에서 대두의 시법(豉法)이 “나라 밖의 산물(外國有豉法)”로 언급된다는 점, 시(豉)의 냄새를 ‘고려취(高麗臭)’라 불렀다는 전승은, 장⋅시 발효 기술이 동북, 즉 고구려와 결부되어 인식되었음을 보여 주는 문화사적 정황이다. 『Shiming (釋名)』(Liu 後漢末)의 ‘시(豉)’의 주석에는 『Bowuzhi (博物志)』를 인용하여 “시(豉) 제조법은 국외에서 비롯되었다[外國有豉法].”라고 한다. 『Beitangshuchao (北堂書鈔)』(Yu, Tang dynasty)에서도 진(晉)의 『Bowuzhi (博物志)』를 인용하여, “外國有豆豉法, 以苦酒浸豆, 暴令極燥, 以麻油蒸訖, 復暴三過乃止.”라고 하여 그 제조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시진(李時珍)이 이르길 “도설강백시법(陶說康伯豉法)”은 『Bowuzhi (博物志)』에 보이며, 원래 국외에서 나온 것이며 중국에서는 전래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강백(康伯)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단독으로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 어렵지만, 앞선 계보와 결합될 때 “말장⋅장시 기술이 동북—한반도권에서 두드러졌고, 외부가 그것을 ‘고려의 것’으로 표지했다.”라는 구조적 설명을 강화한다.
결국 융숙의 출현과 전파, 고려두⋅책성지시의 특산 표지, 고구려 말장의 제도화, 일본 미소로의 확산, 고려 말장의 계승, 그리고 조선에서의 문헌화는 하나의 연속 사슬을 이룬다. 이 사슬이 가리키는 결론은 분명하다.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한 동북 지역은 단순한 콩 생산지가 아니라, “발효 가능한 대두 문명”이 조기에 성숙하고 지속적으로 계승⋅확산된 중심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 절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이 성숙은 ‘우연한 발명’이 아니라 야생종의 자연조건, 저장 기술⋅염(鹽) 자원⋅계절 노동⋅수요 구조⋅교류 조건이 결합한 결과로 이해할 때 가장 설득력이 높다.
4. 대두 이용의 다층적 전개와 조선의 계승
앞 장에서 대두 발효 문화의 기원과 계승을 살폈다면, 본 장에서는 그러한 대두 문명이 장(醬)⋅시(豉)를 넘어 두부⋅콩나물⋅콩기름⋅깻묵, 나아가 사료와 비료로까지 확장되며 조선 사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 양상을 검토할 것이다. 대두 문명의 성숙은 발효 식품에서 멈추지 않는다. 콩은 발효를 중심축으로 하되, 비발효 가공식품과 농업 생산력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며 생활의 기반을 이루었다. 이러한 확장이 고려⋅조선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재현되었다는 사실은, 한반도가 대두 문명의 기원지일 뿐 아니라 지속적 심화지였음을 보여준다.
1) 조선 장류의 제도화와 사회적 기능
조선은 장류의 구분과 인식이 매우 세밀하다. 말장(末醬)과 청장(淸醬)이 각기 다른 범주로 등장하고, 제조법과 용도가 모호한 중국과는 달리 다양한 문헌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조선 초 『Sangayolog (山家要錄)』(Jeon 1450)에 청장 제조법이 여러 방식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청장이 단순 조미료를 넘어 하사품⋅상납품으로 쓰이거나, 약용⋅치료⋅염색 등 생활 기술의 일부로 활용된다는 서술은 장류가 사회적 자원으로 운용되었음을 뜻한다. 말장 역시 특정 고형물만을 가리키기보다, 제조 방식과 저장⋅활용 방식에 따라 의미가 넓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Suunjabbang (需雲雜方)』(Kim 1540)에서 “말장을 소금과 같이 찧는다.”라는 표현과, 『Guhwangchwalyo (救荒撮要)』(anonymous. the late Joseon period)⋅『Jeungbosan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Liu 1766) 등에서 말장과 훈조(熏造, 메주)의 범주가 통합⋅재정의되는 모습 등을 통해, 장류 개념이 생활 실천 속에서 ‘된장’에서 ‘메주와 장 담금 체계’로 확대되어 정착하는 과정을 말해준다. 이는 조선이 장류를 단지 먹거리로만 취급한 것이 아니라, 저장⋅유통⋅의례⋅치료를 포괄하는 복합 기능의 체계로 관리했음을 뜻한다.
이처럼 조선의 장은 가정 내부의 음식에 머물지 않았다. 장류가 공물⋅진상품⋅교환 재화로 기능하고, 지역별 생산과 품질이 구별되며, 때로는 국가가 식량⋅부식(副食)의 안정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인식했다면, 장 담그기 기술은 더욱 강하게 지속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조선 장류의 특징은 단순히“오래되었다.”라는 데 있지 않고, “명칭과 제조법이 분화⋅정교화되며 사회적 기능까지 넓어졌다.”라는 데 있다.
2) 두부의 정착과 가공 기술의 다양화
두부는 발효가 아닌 응고(凝固)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콩 가공식품으로, 대두 이용이 발효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중국에서는 유안(劉安) 발명설 등 다양한 전승이 존재하고, 최근 후한 타호정(打虎亭) 화상석(畫像石)의 그림을 두부 공정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림을 분석해 보면 두부 제조공정이라 하기에는 문제점이 적지 않다. 게다가 오대(五代) 이전에는 두부 관련 기록이 뚜렷하지 않고, 농업 백과전서인 『Qiminyaoshu (齊民要術)』에도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유안설은 전설적 성격이 강하며, 오대 이후에는 점차 기록으로 확인된다(Choi 2009). 반면 한반도에서는 고려 말 『Yangchonjib (陽村集)』(Gwon 14C) 등에서 두부가 확인되고, 이색(李穡)의 시문 등에서도 두부가 양생(養生)에 적합한 음식으로 언급된다. 조선 초 『Sangayolog (山家要錄)』에는 중국의 『Bencaogangmu (Compendium of Materia Medica, 本草綱目)』(Li 1578)과 같이 간수(鹵水) 응고를 기반으로 한 연두부(軟豆腐)가 제시되고, 16세기 『Suunjabbang (需雲雜方)』의 두부에서 경두부(硬豆腐)로의 변화 정황이 나타나는 점은, 두부가 단지 수용된 음식이 아니라 생활 기술로 정착하면서 형태까지 변모했음을 말해준다. 두부의 ‘최초 기원’을 단정하기는 어렵더라도, 한반도 대두 문명이 발효뿐 아니라 비발효 가공식품까지 중국 못지않게 빠르게 체계화했다는 점은 분명히 강조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고려말 『Mogeunjib (牧隱集)』(Lee 15C)에서 월(越)의 물고기 순채와 북방의 양젖과는 달리 하늘이 이 땅에 내린 음식으로 두부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부의 확산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두부는 콩을 “부드러운 단백질 식품”으로 전환시키며, 치아와 소화력이 약한 계층에도 적합한 식품이 된다. 즉 대두 이용의 확대는 단지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 구조와 생애주기, 생활 조건에 대응하는 식생활 기술의 발달로도 이해할 수 있다.
3) 콩나물⋅황권과 ‘발아 식품’의 생활화
콩나물(豆芽)⋅황권(黃卷)은 대두 이용이 ‘발아(發芽)’라는 방향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에서는 황권이 약재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등장하고, 송대 이후 녹두나물이 채소로 평가되는 흐름이 나타나지만, 『Bencaogangmu (本草綱目)』에서 “두아(豆芽)는 지금 사람들은 쉽게 보지만 옛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라는 언급은 보편화의 시기가 늦었음을 암시한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고려의 『Hyangyak-gugeubbang (鄕藥救急方)』(A government compilation 13C)에 대두황권(大豆黃卷)이 등장하고, 조선에 이르면 콩나물이 서민 식품으로 보편화되어 일상적 채소로 정착한다. 특히 “고려 초 군사들이 콩을 냇물에 담가 콩나물을 이용”했다는 이야기는 콩나물 이용이 상당히 이른 시기에 생활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특히 강우량이 풍부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수확 뒤 밭에 떨어진 콩이 자연 발아하여 생긴 싹(豆芽)을 채취하여 나물처럼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대두 문명이 단순한 발효식품에 머무르지 않고, 발효⋅비발효⋅발아 식품으로까지 다양하게 분화⋅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4) 콩기름과 깻묵: 식품에서 농업 생산력으로
콩기름(豆油)과 깻묵(豆餠)으로 가면 대두 문명은 식품을 넘어 산업⋅농업 생산력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중국에서는 송대 이후 두유(豆油) 기록이 문헌에 나타나고, 착유 기술이 발전하면서 조명⋅공업⋅식용으로 유료 작물이 확대된다(Choi 2019a; Choi 2019b). 조선은 『Tiangongkaiwu (天工開物)』(Song 1637)에서 보듯, 중국에 비해 착유 설비⋅기술에서 규모와 방식에서 차이는 있었지만, 맷돌로 가는 북경의 방식과는 달리 ‘절구로 찧어 착유하는 방식(朝鮮有舂法)’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참깨 기름을 생산하였다. 조선시대 두유(豆油)의 출현은 『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Seo 19C) 『Jeongjoji (Culinary Encyclopedia): 鼎俎志)』의 “황백대두유(黃白大豆油)”와 『Ojuyeonmunjangjeonsango (五洲衍文長箋散稿)』(Lee 19C)의 “두유변증설[부사유](豆油辨證說[附楂油]”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규모나 착유 방식은 조선 후기 『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에서와 같은“절구와 맷돌에 넣어 곱게 빻고 쩌서 익힌 다음 착유(분쇄→증숙→압착)”단계를 거친 것을 보면 생산량은 그다지 높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산출된 중요한 것이 깻묵이다. 깻묵은 단백질과 지방이 남아 가축 사료로 유리하고, 동시에 비료로서 속효성 덧거름의 가치를 지닌다. 특히 명청대(明淸代) 이후 인구 증가와 화폐경제 확대, 노동력 조건 변화 속에서 운반⋅부숙⋅보관 부담이 큰 인분뇨(人糞尿)와 남니(罱泥: 강바닥의 진흙) 같은 전통 비료의 시용(施用)을 기피하면서, 상대적으로 취급이 용이한 유박(油粕) 비료가 ‘금비(金肥)’로 주목받는 흐름이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대두 이용이 사회경제 변화와 맞물려 용도가 확대되는 전형을 보여준다(Choi 2016). 또한 깻묵은 토온(土溫)이 낮은 저습지나 하전(下田)에 효과적이며, 부족한 인산⋅칼륨을 석회나 재와 배합해 분해를 촉진하고 비료 효과를 높인다는 기술적 관찰은, 대두 문명이 ‘농업 생산력’의 체계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5) 지력 회복⋅간작(間作) 체계 속의 대두
마지막으로 대두는 지력 회복⋅작부 체계(作付體系)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콩은 토양의 질소를 고정하여 지력을 높이는 작물로서 지력 회복에도 기여한다. 또한 근경(根耕)⋅간종(間種) 방식으로 맥류 그루터기 또는 밭둑⋅무간(畝間)에 콩을 심어 토지 이용도를 높이고, 녹비(綠肥) 작물로 활용해 싹을 갈아엎어 비옥도를 높일 수 있다(Choi 2016). 이러한 활용은 “콩이 먹거리이자 농업기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조선에서도 콩이 적극적으로 재배되고 생활 속에서 소비⋅가공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한반도 대두 문명의 지속성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요컨대 한반도 대두 문명은 융숙 계통의 대두가 발효식품으로 성숙하고, 말장⋅청장 같은 장류 범주가 제도화되며, 그 전통이 일본 미소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조선을 거치며 장류⋅두부⋅콩나물⋅유지⋅깻묵⋅사료⋅비료로 다층적 확장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기원—확산—지속—심화”의 문명사적 구조를 갖추게 된다.
III. 결 론
본고는 콩의 기원 논쟁을 야생콩(野生豆)의 분포가 아니라, “발효 가능한 대두(大豆) 문명의 성숙과 그 지속”이라는 기준으로 재구성하였다. 야생콩은 다양한 지역에서 출현할 수 있고, 이동 또한 인위적 요인의 영향을 크게 받으므로, 그 존재만으로 특정 지역을 기원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반면 장(醬)⋅시(豉)와 같은 발효식품은 종자의 성질, 염(鹽)의 확보와 운용, 저장⋅발효 용기, 기후 조건과 계절노동, 그리고 반복된 경험 지식이 결합되어야 성립한다. 따라서 발효식품의 조기 성립과 장기적 계승 여부는 콩의 기원과 문명사적 위상을 판단하는 데 있어 보다 엄밀한 지표가 된다.
중국 내지에서 콩 이용이 잎(藿)⋅사료 중심에서 장⋅시 중심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전국(戰國)~한대(漢代) 문헌에서 단계적으로 확인되며, 이 전환은 동북 지역에서 유입된 융숙(戎菽)의 도입과 결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융숙은 기존 중국의 숙(菽)과 구별되는 대두 계통으로 인식되었고, 장⋅시 제조에 적합한 성질을 지녔기에 재차 “포지천하(布之天下)”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중국 내지에서 콩의 용도는 발효식품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이런 인식의 변화와 함께 명칭 또한 숙(菽)에서 두(豆)로 변모하는 흐름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콩 이용의 단순한 확대가 아니라, 콩이 사회적 저장 자원으로 재정의되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본고가 특히 주목한 것은, 중국 내지의 확산 과정 그 자체보다도 동북—한반도권에서 확인되는 발효 대두 문명의 연속성과 그 구조적 기반이다. 한반도⋅만주 권역은 야생콩의 자연 선택지였으며, 염장과 저장에 적합한 자연환경, 발효 용기의 축적된 제작 기술, 계절노동 리듬에 맞춘 저장식품 생산, 그리고 젓갈로 대표되는 동이계 염장(鱁鮧)⋅발효 전통이 결합된 공간이었다. 이와 같은 조건은 장⋅시(醬豉)가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음식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반복⋅재생산되는 저장식품 체계로 정착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이 존재했기에, 융숙은 후대에 고려두(高麗豆)로 재현되고, 발해 책성의 시(柵城之豉)가 특산품으로 기록되며, 고구려 말장(末醬)은 일본 미소(味噌)의 기원으로까지 언급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말장 전통은 고려⋅조선을 거치며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어, 장류의 제조법⋅범주⋅용도가 문헌적으로 정교하게 체계화된다.
아울러 본고는 대두 문명이 장⋅시라는 발효 식품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밝혔다. 조선에 이르러 대두는 두부⋅콩나물⋅콩기름⋅깻묵으로 활용 영역을 넓혔고, 사료⋅비료⋅지력 회복⋅작부 체계 속에서 농업 생산력의 핵심 자원으로 기능하였다. 이는 한반도가 단순히 콩을 일찍 재배한 지역이 아니라, 대두 발효 문명이 장기적으로 심화⋅확장된 공간, 다시 말해 ‘대두 문명권’의 중심부였음을 보여 준다.
이상의 논증은 특정 유물이나 단일 문헌에 근거한 단정이 아니라, 발효 기술의 성립 조건, 명칭과 용도 변화, 발효 식품 계보의 연속성, 그리고 생활 속 활용의 지속을 종합하여 도출된 결과이다. 이러한 접근은 콩의 기원을 둘러싼 논의를 단순한 지역 간 우열의 문제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물질문명이 형성⋅심화되는 과정 속에서 이해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앞으로의 연구는 이미 축적된 문헌과 고고 자료를 유전학적으로 정밀하게 교차 검토하는 방향에서 진전될 필요가 있다. 동북⋅한반도 지역의 콩 출토 사례 정리, 장⋅시 관련 명칭과 용례의 시기별 비교, 발효식품의 유통과 소비를 보여주는 제도⋅생활 자료의 재검토 등은 현실적인 후속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축적은 오늘날 K-푸드의 역사적 정체성을 ‘한반도 대두와 그 가공식품’이라는 축 위에서 재정립하는 데에도 중요한 학문적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