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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30 No.1 pp.64-76
DOI : https://doi.org/10.7318/KJFC/2015.30.1.064

Study on Dietary Usage and Prohibition on Beef in Joseon Dynasty

Seung-Woo Kim, Gyung-Hee Cha*
Department of Traditional Food Business, Jeonju Graduate School
Corresponding author: Gyunghee Cha, Department of Traditional Food Business, Jeonju Graduate School, 303 Cheonjam-ro, Wansan-gu, Jeonju, Jeonbuk, 560- 759, Korea Tel: 82-10-3481-4580 Fax: 82-63-220-2736 injeulmi@hanmail.net
20141210 20150128 20150212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d data on beef dietary consump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including「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and「Ilsongnok」. Beef stands for superstitions as well as respect, broad-mindedness, exquisite culinary taste, and is a symbol of taste. In the historic record, we found two extremely opposite trends; specifically, Ugeum (牛禁, forbidding beef consumption and indulgence in beef). On the one hand, believing that they were the rudimentary foundation to Korea’s agriculture, Joseon authorities tried to protect cows and bulls as valuable agricultural assets. Meanwhile, there were several officially sanctioned beef consumption events in the Joseon period. These included Jesu (祭需, food for ancestral rites), Daejup (待接, servings), Hasa (下賜, bestowment), and Hogue (饋, comforting soldiers with culinary methods). These included offerings to the departed spirits, servings, bestowment, and comforting soldiers with culinary methods. Especially in Joseon’s Yeonhang (燕行) Journals, we can see different beef distributions and preferences between Japan and China. Furthermore,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even addressed the general issue of beef treatment; special methods for beef processing, beef distribution, tool materials, and prices of beef.


조선시대 고문헌에 나타난 소고기의 식용과 금지에 대한 고찰

김 승우, 차 경희*
전주대학교 일반대학원 전통식품산업학과

초록


    I.서 론

    중국 진(晉)(265~317)시대의 「Susingi (搜神記)」에는 “맥 적(貊炙)은 이민족의 음식인데도 태시 이래 중국 사람들이 이를 즐긴다. 귀인이나 부유한 집의 잔치에 반드시 내놓고 있으니 이것은 그들이 이 땅을 침범할 징조다.”라고 하여 우 리나라 고기구이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것을 알 수 있다(National Culture Promotion ed.「Goryeosajeolyo (고 려사절요, 高麗史節要)」2004). 그 맥적은 설하멱적(雪下覓 炙)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눈 오는 날 운치 있게 즐겼던 설하멱적은 너비아니를 거쳐 지금의 불고기로 발전하였다. 불고기는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 중 하나이다. 이렇듯 우리의 고기음식의 역사는 유구하다.

    하지만 우리민족의 육식(肉食) 문화는 평탄치만은 않았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의 전래 이후로 육식은 금기사항이 되었다. 고려왕조 또한 불교를 국교로 삼 았기 때 문에 살생금지를 위해 소 도축금지령인 우금령(牛禁令)을 여 러 번 내렸다.Goryeosajeolyo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 의 기록에 의하면 광종 19년(968) 도축금지령을 필두로 하 여 문종 20년(1066)은 3년간이나 도축을 금하였다. 또 예종 2년(1107)에도 살생을 금하였다. 그 후에도 충숙왕 12년 (1325)년과 공민왕 11년(1362)에 농우 보호를 위하여 금살도 감(禁殺都監)을 설치하였다(National Culture Promotion ed. 2004). 그러나 고려 말 원나라가 일본 침략을 위해 고려를 원나라의 병참지로 정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원은 고려 원 종 12년(1271)에 농우 6,000두를 요구하고, 고려는 공급할 만큼의 소가 없어 곽여필(廓汝弼)을 몽고에 보내 실정을 호 소하기도 하였다. 농우 징발에 실패한 몽고는 목축에 능숙한 몽고인과 말 160필, 우량 품종의 소를 이끌고, 제영문주도에 목장을 설치하였다(Lee 1978). 그리하려 충렬왕(忠烈王) 23 년 이후에는 오히려 원나라에 소고기를 보낼 정도로 소의 양 과 질이 좋아졌고, 고려인들은 몽고인들의 능숙한 도축법과 고기 요리법을 배우고 그 맛에 빠지게 되었다(National Culture Promotion ed. 2004).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백성 모두가 소고기 맛에 매료되었 다. 한번 시작된 육식의 경험은 봇물처럼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식육에 의한 농우의 감소는 한재(旱災)에 의한 농사 의 피해보다 훨씬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고, 왕들은 우금령(牛 禁令)으로 소를 보호해야만 했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숙종실록(肅宗實錄) 9년 1월 28일 1번째 기사).

    농사를 짓다 늙거나 다친 소의 도축은 합법적으로 허용되 었다. 하지만 이런 소의 고기는 질겼다. 그러므로 질긴 고기 를 맛있게 먹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하게 되었다(Kim 2014). 소고기에 대한 욕망은 맛있는 소고기 조리법의 탄생으로 이 어졌고, 소고기 음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소고기는 우리민족이 고래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식재료 중 의 하나이나, 소고기를 이용한 전통음식에 대한 고찰은 조리 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있을 뿐 아직 미진한 실정이다(Kim 1995; Oh 2003). 특히 소고기가 우리 조상들에게 어떻게 인 식되고 활용을 되어 왔는지에 대한 연구는 없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고문헌과 자료, 그리고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 정원일기, 承政院日記)」, Ilseongnok (일성록, 日省錄)」 등 의 관찬 자료를 통하여 우리나라 소고기의 역사와 조선인들 에게 소고기는 어떤 의미였으며,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를 살 펴보고자 하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II.연구 내용 및 방법

    1.연구대상 문헌과 콘텐츠

    조선시대 소고기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Table 1>과 같 이 소고기가 인용된 조선시대 64권의 고문헌들을 수집 분석 하였다. 고문헌은 원문 및 현대어 번역본으로 발행된 문헌, 그리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한국고전종합DB에 구 축된 아카이브 자료를 활용하였다(http://db.itkc.or.kr). 고문헌 을 내용상으로 분류하면 시문집(詩文集)이 25권으로 가장 많 았다. 다음으로 연행록(燕行錄)이 총 16권이었는데, 중국을 다녀온 기록이 10권과 일본을 다녀온 기록이 5권, 일본인이 조선을 방문하고 쓴 기록이 1권이었다. 문집류 6권, 사서류 (史書類) 4권, 일기류(日記類) 5권, 잡기류(雜記類) 1권, 관찬 지리서(官撰地理書) 1권, 설화집(說話集) 1권, 수록류(隨錄類) 1권, 기사문(記事文) 1권, 유서류(類書類) 1권이었다. 저술된 시대별로는 1300~1500년대가 11권, 1600년대가 15권, 1700 년대가 22권, 1800년대가 14권, 1900년대가 2권, 미상이 1 권이었다.

    또한 한국콘텐츠문화진흥원에서 조선시대 풍속화 중 본 연 구목적에 적합한 내용을 담은 풍속화를 조사하였고(http:// www.culturecontent.com), 국사편찬위원회의에서 제공하는 아 카이브를 활용하여「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조 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http://sillok.history.go.kr),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 정원일기, 承政院日記)」(http://sjw.history.go.kr)Ilseongnok (일성록, 日省錄)」(http://e-kyujanggak.snu.ac.kr)에서 소고기 기록을 각각 63회와 12회를 찾아 비교 분석하였다.

    2.자료 분석 방법

    연구대상 문헌은 ‘우육(牛肉), 황육(黃肉), 소고기, 쇠고기, 고기, 우금(牛禁), 푸줏간, 현방(懸房), 다림방’ 등의 키워드로 내용을 조사하였고, ‘고기’로만 기록된 내용은 원문을 살펴 소고기에 해당되는 내용만을 발췌하여 분석 자료로 이용하 였다. 수집된 모든 문헌들의 분석을 위하여 내용분석(Content analysis) 기법을 응용하였다(Yu & Kim ed.「Research methods of mass media」1995). 내용 분석방법은 20세기 초 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3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사이에 과학적인 연구방법으로 발달 응용되었 다. 내용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석 유목의 설정이다. 분석 유목은 주어진 연구문제나 연구목적에 잘 부합되어야 하고, 분석단위들을 분류 집계하여 메시지를 분석하는 방법 이라고 할 수 있다(Lee & Cho 2008).

    본 논문에서는 양적, 질적 연구방법을 모두 사용하였다. 양 적 분석 방법으로는 소고기가 언급된 조선시대 고문헌,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그리고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Ilseongnok (일성록, 日省錄)」의 내용을 분석단위로 하였다. 질적 분석은 각 내 용의 요지를 분류하여 분석 유목에 맞는 내용들을 체계적으 로 정리하여 분석하였다. 질적 분석으로는 고문헌에 나타난 농우(農牛)의 보호와 소고기 탐식(貪食), 소고기의 활용, 소 고기의 유통, 중국과 일본의 소고기 이용, 조선에서의 소고 기의 의미 등으로 나누어 비교 고찰하였다.

    III.결과 및 고찰

    1.농우(農牛)의 보호와 소고기 탐식(貪食)

    1)농우(農牛)의 보호

    조선은 전형적인 농업 국가였고, 소는 조선시대 농업의 가 장 중요한 생산수단 중 하나였다. 백성들은 흉년이 되면 굶 주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농우(農牛)의 손실은 가뭄이 나 홍수 등 자연재해와 함께 농사의 작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소가 없을 경우 농지에서 그루갈이를 깊 게 할 수 없어 이듬해의 소출량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조선왕조는 소고기의 도살을 막는 우금(牛禁), 술 빚기를 금지하는 주금(酒禁), 소나무의 벌목을 금지하는 송금(松禁)령을 반포하였는데, 특히 우금을 강조하였다(Kim 2006).

    우금은 고문헌에서 소고기에 관한 기록 중 가장 많았다. 우금에 관한 기록은 고문헌 27회,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38회,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 정원일기, 承政院日記)」 2회,Ilseongnok (일성록, 日省錄)」 1회로 총 68회 기록되었다.

    우금령(牛禁令)

    우금령은 농사에 큰 도움을 주는 농우의 보호를 위해 조 선시대의 국왕들이 내린 소 도축 금지령이다. 조선은 고려와 반대로 숭유억불정책이 기본 정책이었다. 고기를 먹는 것은 허용됐지만, 농우(農牛)의 보호를 위해 우금령은 계속되었다. 조선시대의 우금령은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의 <태조실록(太祖實錄)>(7년 9월 12일 5번째 기사)부터 <순조실록(純祖實錄)>(21년 8월 7 일 4번째 기사)까지 22번이나 기록되었다. 이는 20년에 한번 꼴로 우금령을 내린 것을 뜻한다. 1대인 태조부터 23대인 순 조까지라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국왕들은 재위시절 1번 정 도는 우금령을 반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태조와 세종 대에 우금령을 내렸지만, 의주의 백성들에 의 해 많은 소의 도축이 계속되자 선조는 다시 강력한 우금령 을 내렸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태조실록 (太祖實錄) 7년 9월 12일 5번째 기사; 세종실록(世宗實錄) 1 년 3월 27일 6번째 기사; 선조실록(宣祖實錄) 26년 2월 19일 4번째 기사). 조선 중기 이후에도 우금령은 줄을 이어 반포된 것으로 보아 그만큼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금령을 내린 국왕이 있는가 하면 연산군(燕山君)은 자신 이 마음껏 소고기를 먹기 위해 우금령을 폐지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1 년 4월 20일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2년 6월 23일 4번째 기사). 연산군이 즐긴 육식은 백성의 삶을 어렵 게 한 원인 중의 하나로 나타나자 다음 왕위에 오른 중종(中 宗)은 즉위한 이듬해 다시 우금령을 내렸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중종실록(中宗實錄) 1년 9월 4일 5번째 기사). 그 후에도 우금령은 국왕들에 의해 농우(農牛)를 보호 하고자 계속되었다.

    우금령 준수

    조선시대 우금령을 준수한 이유는 우금령을 지키기 위한 준법(遵法), 부모님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던 아픈 기억으 로 인한 효심(孝心)에 의한 우금, 농사를 도와줬는데 죽어서 고기까지 먹을 수 없다는 연민(憐憫)이 있었다.

    준법(遵法)을 이유로 우금을 하는 경우는 소고기를 자신이 나 아랫사람이 소고기를 먹어 스스로 사직을 요청하는 경우 와 애초에 소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있었다. 소고기를 먹어 금령을 어긴 이유로 스스로 파직을 요청하는 경우는 3번 있 었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연산군일기(燕山 君日記) 5년 10월 29일 1번째 기사, 중종실록(中宗實錄) 24 년 11월 5일 2번째 기사;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인조 3년 10월 23일). 하지만 모두 사직이 받아들여지지 않 았다. 사대부들에게는 처벌이 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정구(李廷龜)는 병이 걸리자 자제들이 보신을 위해 소고 기를 권했지만, 법을 어길 수 없다고 꾸짖었고(Lee 「Wolsajib (월사집, 月沙集)」1636), 윤증(尹拯)은 아들이 보내오는 선 물은 반가워하면서도 금육(禁肉)인 소고기는 보내지 말라고 꾸짖는 편지를 4통이나 띄웠다(Yun 「Myeongjaeyugo (명재 유고, 明齋遺稿)」1732). 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하는 효심 깊 은 아들의 마음은 국법을 준수하고자 하는 아비의 준법정신 앞에 막히기도 하였다.

    반대로 효심(孝心)에 의해 금육(禁肉)을 하는 경우도 있었 다. 권별(權鼈)은 어머니가 관직이 있는 아들이 소고기를 먹 는 것을 걱정하자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소고기 섭 취를 금하였다(Kwon「Haedongjabnok (해동잡록, 海東雜錄)」 1670). 부모님 생전에 드시고 싶어 하시던 소고기를 못 드린 효자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차마 입에 댈 수가 없었 다(Kim「Shindogjaejeonseo (신독재전서, 愼獨齋全書)」1710; Lee「Sunamjib (순암집, 順菴集)」1741). 또한 평생 농사를 도와준 소에 대한 연민(憐憫)으로 죽은 소의 고기를 먹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경우도 있었다(Song 「Songjadaejeon (송자대전, 宋子大全)」1787).

    혼마 규스케는「Joseonjabgi (조선잡기, 朝鮮雜記)」(Choi HJ ed. 1894)에서 “조선인은 소고기를 아주 좋아한다. 팔도 의 목장을 관부가 관리하고 도축할 때 전을 납입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소가 대단히 비대하여서 서양의 젖소에 뒤떨어 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조선은 전 시기를 걸쳐 농우(農 牛)의 보호를 위해 우금령(牛禁令)을 내렸지만, 소고기에 대 한 욕망을 멈출 수 없었다. 조선 초기 왕과 양반들에게서 시 작된 육식의 향유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백성들까지 이 어졌다.

    우금령 위반 시의 처벌

    조선시대에는 우금령을 지키는 경우 보다는 어기는 경우 에 대한 기록이 더 많았고, 처벌도 다양하였다. 조선 최초의 우금령에 의한 처벌은 태조 때였다. 우금령 위반 시 도성 밖 으로 추방과 곤장으로 엉덩이를 치는 태형(笞刑) 50대였다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세종실록(世宗實錄) 7년 2월 4일 3번째 기사). 때론 국문(鞫問)도 받기도 하고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세종실록(世宗實錄) 11년 10월 11일 5번째 기사), 파직(罷職)도 되었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세종실록(世宗實錄) 16년 8 월 2일 3번째 기사).Yulgokjeonseo (율곡전서, 栗谷全書)」 (Lee 1611)에는 파직에만 멈추지 않고 변방으로 내쫓는 경우 도 있었다. 또, 소를 도축하는 자는 재산을 몰수하고, 그 재 산을 신고한 자에게 주기도 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태종실록(太宗實錄) 15년 6월 5일 1번째 기사). 형벌을 받는 도중에 치사(致死)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중종실록(中宗實錄) 17년 6월 1일 3번 째 기사).

    우금령을 어길 시 처벌의 강도가 높았으므로 암행어사가 탐관오리들을 보고할 때에도 소고기를 먹는 것이 중요한 죄 목 중 하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인조 실록(仁祖實錄) 26년 2월 17일 1번째 기사). 하지만 이를 이 용하여 우의정 성준(成俊)은 음해(陰害)를 당하는 경우도 있 었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연산군일기(燕山 君日記) 5년 10월 29일 1번째 기사). 조선말 고종(高宗)에 이 르러서 도축이 만연하자 소고기를 먹는 것은 경범죄가 되었 다(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고종 5년 6월 13일).

    이와 같이 조선시대 전반을 걸쳐 우금령을 지키지 않아 받 는 처벌은 다양하였다. 스스로 자수를 해서 면죄(免罪)를 받 는 경우와 가볍게는 간단히 죄를 묻는 경범죄(輕犯罪)부터 중하게는 태형(笞刑), 국문(鞫問), 파직(罷職), 체포(逮捕), 유 배(流配) 까지 있고 더 심한 경우는 심문을 받는 도중에 사 망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계속된 처벌은 우리 조상들의 소 고기에 대한 열망의 반증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문서 작성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Yuseopilji (유서필지, 儒胥必知)」(Jeon et al. ed. 2006)에는 부모의 병 환에 전우고(全牛膏)를 쓰게 해달라는 소지(所志)와 소의 다 리가 부러졌을 때 올리는 소지의 양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우금령의 엄격함을 알 수 있다. 병이 든 부모의 치료를 위해 우황(牛黃)을 쓰고자 하는 상전을 위해 노비는 관아에 “삼가 소지를 올리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상전은 어버 이의 병환이 한달 전부터 갑자기 깊어져 진단을 한 결과 의 원이 풍허(風虛)라고 하였습니다. 치료를 위해 의원은 반드 시 전우고를 복용하여야 나을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우금( 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 즉 삼금(三禁)은 실로 나라에 서 금하는 일이라 감히 이것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저의 상전은 그저 혼자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이에 우러러 호소 하오니 엎드려 청하옵건대 잘 헤아리신 후 그 처지를 굽어 살펴주시어 물금첩(勿禁帖)을 작성해 주셔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소서. 안전주(案前主)께서 처분해 주시기를 천만번 간절히 바라나이다.”라고 소장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관 아에서는 날짜를 써서 “소를 잡아 가죽을 벗길 때 아전들은 침탈하지 말지어다.”라고 첨부하여 관인을 찍어 내려 주었 다. 또 일을 하던 소의 다리가 부러진 경우에 올리는 소지는 “삼가 소지를 올리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땔감장사 를 생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이번 엄동대한에 땔감을 실어 나르던 튼튼한 소가 갑자기 빙판길에 넘어져서 마침내 다리 가 부러졌습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우러러 호소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잘 헤어리신 후 특별히 처분을 내려주소서. 안전주 께서 처분해주실 것을 천만번 간절히 바라나이다.”라고 소장 을 제출하면 관아에서는 심사를 하여 허락을 해줄 때 “가죽 은 벗겨서 관에 바치고, 고기는 팔아 송아지를 사는 것이 마 땅하다.”라고 부기한 후 관인을 찍어 소의 도축에 대한 증빙 에 엄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2)소고기 탐식(貪食)

    소고기 탐식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국왕들의 우금령(牛 禁令)과 각종 처벌도 아랑곳 하지 않았던 소고기 사랑의 다 른 이름이다.

    국왕

    세종(世宗)은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로 육 식을 선호하였다. 그에 걸맞게 조선의 국왕 중에 고기에 관 한 기록도 505번으로 가장 많았다. 태종은 자신이 죽으면 세 종이 상(喪) 중에 고기를 먹지 않아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여 고기를 먹게 하라고 신하들에게 당부할 정도였다(Oh & Choi 2012). 하지만, 세종이 태종의 유언을 지키지 않아 날로 수척 해지자 이를 걱정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세종실록(世宗實錄) 4년 11월 1일 1번째 기사).

    조선의 역대 왕 중 소고기를 탐식하는 것이 세종에 비견 되는 이는 연산군(燕山君)이었다. 날마다 소 10마리씩을 잡 았다. 소고기를 진상할 때는 한양으로부터 가까운 도(道)에 서는 생고기로, 먼 도에서는 포(脯)로 진상케 하였다. 또 소 의 태(胎)를 즐겨 먹으니 백성들의 곡(哭)소리가 끊이지 않았 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연산군일기(燕山君 日記) 11년 4월 20일 1번째 기사). 소고기의 진상은 평상시 에는 포로 하였고, 기온이 내려가면 생고기로 진상하게 하였 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연산군일기(燕山君 日記) 12년 6월 23일 4번째 기사).

    연산군의 삐뚤어진 소고기 탐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 2마리를 늦게 가져와 사축서(司畜署)의 담당관을 가두고 국문(鞠問)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연 산군일기(燕山君日記) 11년 12월 21일 2번째 기사). 불시(不 時)에 고기를 올릴 것을 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사축서에서 준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백성들의 소를 때려잡아 바치게 했으니 그 원망이 얼마나 클지 짐작하고도 남는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2 년 3월 14일 2번째 기사).

    소고기 탐식은 광해군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은 고기를 덜 익혀 먹고 날고기를 즐겨서 눈이 점점 붉어졌다고 하였 다(Jeong EI ed.「Gyechugilgi (계축일기, 癸丑日記)」 2005). 물론 삐뚤어진 소고기 탐식은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은 폭군 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선조의 6번째 왕자인 순화군(順 和君)은 하급관리가 소고기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접 그 관리의 집에 찾아서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 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선조실록(宣祖實 錄) 34년 2월 1일 3번째 기사).

    양반

    우금령은 지배층인 양반들에게는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았 다. 소고기를 즐기는 양반들이 단속과 처벌을 하다 보니 당 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형벌 대신 벌금 으로만 대신했고, 소고기 탐식은 여전하였다.

    Eouyadam (어우야담, 於于野譚)」(Shin IC ed. 2006)에서 김계우는 항상 한 달에 소 6마리를 먹고,Haedongyeogsa (해동역사, 海東繹史)」(Han 1765~1814)속의 장군은 소고기 요리인 태뢰(太牢)를 좋아해 하루에 소 9마리를 잡았다.

    Domundaejak (도문대작, 屠門大嚼)」(Heo 1611)에서 대궐 푸줏간의 소고기를 천하의 좋은 음식의 대명사 중 하나로 꼽 았다.Yeonamjib (연암집, 燕巖集)」(Park 1737~1805)Donggugsesigi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Hong 1849)에 서 양념한 고기를 화로에서 구워먹는 난로회(煖爐會)가 나온 다. 양념해서 먹는 것을 보니 지금의 불고기를 먹는 것이 양 반들 사이에서 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모습을 아래의 두개의 그림에서 볼 수 있었다.

    <Figure 1>은 김홍도(金弘道)의「Sagyepungsogdo (사계풍 속도, 四季風俗圖)」(1700s)의 겨울장면 중 설후야연의 한 장 면이다(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8첩으로 각 계절별 로 2첩씩 구성되어 있다. 눈 오는 겨울밤에 양반 5명과 기생 들이 눈밭에서 술과 함께 화롯불에 고기를 구어 먹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양반들의 난로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군인들이 쓰는 전립투(氈笠套)를 뒤 짚은 형 태에서 넓적한 테두리에는 고기를 굽고 가운데의 오목한 부 분은 채소와 국물을 담아 먹고 있는 모습이다.

    <Figure 2>는 성협(成夾)의「Seonghyeobpungsoghwacheob (성협풍속화첩, 成夾風俗畵帖)」(1800s)의 <야연(野宴)>이다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야연(野宴)은 난로회의 다 른 이름이다. 화면 상단의 제시에 의하면, 관례를 마치고 어 른들을 모시고 술과 고기를 대접하며 조촐한 축하의 자리를 마련한 듯하다. 김홍도의 그림에서와 같이 화로 위에 전립투 를 놓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에서 고기를 연신 구워먹는 모 습이다. 숯을 바구니에 넉넉히 담아 놓은 모습이 인상적이 다. 관례는 조선시대 남자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상투를 틀 어 갓을 씌우고 결혼할 자격과 벼슬길에 오를 권리를 갖는 중요한 통과의례이다. 이런 중요한 관례 때 축하하기 위해 고기를 먹고 있는 모습은 양반들에게 소고기가 어떤 의미인 지 알 수 있다.

    백성

    일반 백성들도 소고기의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Songsadaejeon (송자대전, 宋子大全)」(Song 1787)과「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숙종실록(肅 宗實錄) 9년 1월 28일 1번째 기사의 내용이 거의 같다. 내용 은 아래와 같다.

    소의 전염병인 우역(牛疫)으로 살아남은 소가 없다. 그런 데도 소고기 맛을 으뜸으로 쳐서 이를 먹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이 여긴다. 우금령을 무시하고 있으니 어서 조목(條目)을 따로 만들어서 중외(中外)에 반포하라. 그래야 백성들의 실 농(失農)이 한재(旱災)보다 심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조선시대 실농의 가장 큰 이유인 한재보다도 농우의 식육 으로 인한 실농이 더 큰 피해라고 볼 정도로 심각하였다.

    2.소고기의 활용

    1)제수(祭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제례는 중요한 덕목이었다.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계속되는 우금령 이지만, 제사나 큰 연회에서는 예외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정조실록(正 祖實錄) 14년 10월 14일 번째 기사). 제수로는 가장 귀한 것 으로 올렸고, 소고기가 중심이 되었다. 제사상의 소고기는 말 린 소고기인 편포(片脯), 소고기 국, 날고기, 숙육(熟肉)이 올 라갔다.

    편포는 제수로 가장 많이 사용된 소고기 음식이었다. 기록 된 문헌은Sagyejeonseo (사계전서, 沙溪全書)」(Kim 1687),

    Gugjobogam (국조보감, 國朝寶鑑)」(Shin et al. 1457), Songjadaejeon (송자대전, 宋子大全)」(Song 1787),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정조실록(正祖實錄) (1776~ 1800),Dasansimunjib (다산시문집, 茶山詩文集)」(Jeong 1800初)이 있었다. 제사에 쓸 편포가 상하기 때문에 말고기 를 섞어서 만들기도 하였다(Song「Songjadaejeon (송자대전, 宋子大全)」1787). 편포와 비슷한 소고기를 잘게 다진 다음 조각내서 말린 육포인 중포(中脯)도 있었다(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 기, 承政院日記)」 고종 22년 8월 11).

    편포 다음으로 소고기를 많이 쓴 제수는 소고기국이었다. Sagyejeonseo (사계전서, 沙溪全書)」(Kim 1687)에서는 소 고기 국을 향(月鄕)이라고 했고, 태묘(太廟)에서 등갱(登瓦羹)과 형갱(金刑羹)에 소고기를 썼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영조실록(英祖實錄) 21년 7월 2일 2번째 기사). 등 갱은「Hongjaejeinseo (홍재전서, 弘齋全書)」(Jeongjo (正 祖), 1799)와Yeoheonjib (여헌집, 旅軒集)」(Jang 1554~ 1637)에도 나온다. 여기서 등갱은 곧 대갱(大羹)인데, 간을 하 지 않은 소고기 국이고, 형갱은 고기와 나물을 섞어 간을 하 고 끓인 국을 말한다.

    날고기는 제수는 제수로 사용되었다. 종묘의 진설에 소고 기는 날고기를 그대로 담았고(「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세종실록(世宗實錄) 14년 7월 29일 3번째 기사), 소의 머리와 네 다리, 어깻살, 갈비, 등심이 생고기로 나오고 부위 이름 까지 기록되어 있었다(Jeongjo 1799). 숙육(熟肉) 도 제수로 사용하였는데, 소의 내장(腸)·위(胃)·폐(肺)를 삶아서 이용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세종실록(世宗實錄) 14년 7월 29일 3번째 기사).

    Baeghojeonseo (백호전서, 白湖全書)」(Yun 1617~1680) 에서는 천자(天子), 제후(諸侯), 경(卿), 대부(大夫), 선비[士], 서인(庶人)이 제사를 지내는데 필요한 제물을 설명하면서 소 고기는 천자와 제후만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하였다. 흉작 으로 백성의 각종 제향의 절감을 상소하였다. 그러면서 양 (羊)은 쓰지 말고, 소는 계속 쓰라고 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숙종실록(肅宗實錄) 12년 11월 29일 2번째 기사). 이것으로 보아 소고기는 필수불가결한 제수였 음을 알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소고기를 도축하는 것을 안타 까워 양(羊)고기로 대체한 때도 있었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영조실록(英祖實錄) 36년 6월 2일 1번째 기사).

    율곡은 생전에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소고기는 가장 기본적인 제수였으나, 그의 기일마다 소고기를 제수로 쓸 것인 지에 대한 고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Song 「Songjadaejeon (송자대전, 宋子大全)」1787).Maecheonjib (매천집, 梅泉集)」 (Hwang 1896)에는 바닷가에서 선신(船神)에게 드리는 제사 에도 소고기를 쓴다는 내용이 있었다.

    2)치료식

    소고기는 몸을 보하는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남이( 南怡)가 국상(國喪) 중에 소고기를 먹고, 이를 들켜 추궁하자 질병이 앓던 중 어미의 간곡한 청으로 먹었다고 해명하였다 (「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예종실록(睿宗實錄) 즉 위년 10월 25일 2번째 기사). 이와 반대로 소고기를 먹다가 독살(毒殺) 되었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선 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35년 10월 1일 2번째 기사). 소고 기는 질병 치료의 목적으로도 이용되었지만, 독살의 매개체로 도 사용되었다. 홍만선(洪萬選)의 Sanlimgyeongje (산림경 제, 山林經濟)」(National Culture Promotion ed. 2007)에는 소고기 독에는 남아(男兒)를 처음으로 출산한 부인의 젖이나 진하게 달인 감초(甘草)를 먹으면 낫는다고 하였고, 우슬(牛 膝)이 들어간 약에는 소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3)대접(待接)

    소고기는 생명의 은인부터 중국의 사신까지 대접하는 귀 한 음식이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에 자신의 목숨을 구 해준 명(明)나라 군에게 은혜를 갚고자 소고기를 바쳤다 (Jeong「Godaeilnok (고대일록, 孤臺日錄」1592~1609). 정 묘호란 후 후금(後金)의 사신을 닭 대신에 소고기를 대접하 는 것에 대해 어떤지 2일에 걸쳐서 논의하였다(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 기, 承政院日記)」 인조 5년 5월 24~25일).

    Mogeunjib (목은집, 牧隱集)」(Lee 1404)에는 이색(李穡) 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가난한 마을 주민들은 닭고기 를 준비하지만, 조금 형편이 나은 현령들은 술과 소고기로 그간의 노고를 감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목은 은 소고기를 선물 해준 권밀직(權密直)에게 감사한 마음을 시(詩)로서 화답하였다. 즉 당시 소고기는 서민들이 쉽게 구 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다.

    조선 중기에 이경직(李景稷)은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을 때 일 본에서 소고기를 대접받았다(Lee「Busangnok (부상록, 扶桑錄)」 1617). 청(淸)나라를 다녀온 사행일기를 보면 광록시(光祿寺)에 서 소고기를 1근에서 1근 반을 받았다(Choi 「Yeonhaengnok (연행록, 燕行錄)」1712; Kim 「Yeonhaengilgi (연행일기, 燕 行日記)」1713; Seo 「MuoYeonhaengnok (무오연행록, 戊午 燕行錄)」1789; Kim 「Yeonhaengnok (연행록, 燕行錄)」 1792; Kim「Yeonwonjigji (연원직지, 燕轅直指)」1833).

    소고기가 귀한 음식으로 대접하는데 많이 쓰인 만큼 뇌물 로도 사용되었다. 힘이 없던 아전들이 소고기를 수령들에게 바쳤고, 바치지 못한 이는 파산하고 도주까지 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선조실록(宣祖實錄) 38년 4월 16일 9번째 기사). 벼슬아치들은 소고기와 술을 주고, 보답으 로 은(銀)과 중국 여자들을 받았다(Park「Eungcheonilnok (응천일록, 凝川日錄)」1635). 벼슬아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 도 토지의 경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 측량사 업인 양전(量田)을 잘 받기 위해서 소고기와 술을 대접하여 부과되는 액수를 줄여 보려고 하였다(Jo「Pojeojib (포저집, 浦渚集)」1692).

    좋은 의미로 대접한 소고기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기 도 하였다. 오랑캐들에게 소고기와 술을 권해서 취하게 한 뒤 인질을 구출하는 작전을 성공하였다(Nam「Yagcheonjib (약천집, 藥泉集)」1723). 하지만, 부하가 뇌물의 목적으로 병 조판서에게 소고기를 대접하였으나 그것을 먹고 사망하는 바 람에 곤혹을 치루기도 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숙종실록(肅宗實錄) 44년 5월 10일 1번째 기사).

    이처럼 소고기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현령에 대한 감 사의 마음으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타국의 장수에게 대 한 보은을 위해 대접하였다. 청(淸)과 일본으로 간 사신은 현 지에서 소고기를 대접받거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뇌물로 도 사용하였다. 때론 인질구출작전의 미끼로도 사용되었다. 이렇듯 소고기는 우리 조상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거나 출 세의 욕심, 적을 기만하기 위한 미끼 등 단순한 고기 이상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4)하사(下賜)

    하사(下賜)는 왕이 신하에게, 혹은 지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물건을 주는 것을 말한다. 하사품 중 소고기는 자 주 등장하였다. 소고기는 왕이 주로 노인들에게 하사하였다. 원숙(元肅)과 백언(白彦)의 늙은 모친에게 소고기를 하사하 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세종실록(世宗實 錄) 1년 9월 15일 3번째 기사, 9년 4월 23일 2번째 기사). 제주도에서는 잔치를 베풀고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소고기 를 2근씩, 90세가 넘으면 1근을 더 하사하였고(「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순조실록(純祖實錄) 14년 3월 5일 2번째 기사), 한(漢)나라 때부터 내려오는 제도를 따라서 특 별히 효자(孝子)에게는 소고기를 더 하사하기도 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영조실록(英祖實錄) 21년 1 월 22일 3번째 기사). 이처럼 노인들의 보양이나 효자들의 격려 차원으로 소고기는 하사품 중 필사적으로 사용되었다.

    5)호궤(牛高饋)

    호궤(牛高饋)는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서 위로하는 것이다. 귀 했던 소고기는 피땀 흘려 고생하는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선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었 다. 왕을 수행한 군병들에게도 소고기로 호궤 하였다(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고종 9년 3월 3일; Lee 「Cheongjanggwanjeonseo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the late 1700; Seo 「Mangiyoram (만기요람, 萬機要覽)」1808).

    남구만(Yagcheonjib (약천집, 藥泉集)」 1723)과 이유원 Imhapilgi (임하필기, 林下筆記)」 1781)은 왕이 대가(大駕)를 수행한 것과 한나절 동안 조련한 것을 시상할 때 소고기로 호궤하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현탁(玄鐸)은 군수에 보태도록 자원군(自願軍) 200명에게 소고기 300근을 기부하여 호궤하 도록 하였다(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고종 3년 9월 19일). 소고기는 귀한 음식으로 군사들의 고생한 세월과 땀 과 노력의 보상이었다.

    6)무기 제조

    소고기는 무기 제작과정에서 부재료로도 사용되었다. Yagcheonjib (약천집, 藥泉集)」(Nam 1723)에는 화약을 만 들기 위해 사용하는 석유황(石硫黃)을 모래흙에 섞는 과정 중 소고기 기름과 함께 쓰면 그 효과가 좋다고는 내용이 기록되 어 있었다. 즉 소고기 속의 지방과 단백질 성분이 다른 재료 들과의 결착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윤활제로 기여하여 무기 제작에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먹기도 귀했던 소고기는 화약을 만드는 무기의 재료가 되기도 하여 식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전반에 두루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소고기의 유통

    오늘날의 정육점, 즉 조선시대의 푸줏간은 현방(懸房)이다. 현방은 도사(屠肆) 또는 다림방이라고도 불렀다. 현방은 농 우의 도살을 금지하고, 소고기와 그 부산물의 공급과 관리를 위하여 설치되었다. 그 운영권은 성균관 노복들이 가지고 있 었는데, 성균관이 문묘 제사에 바칠 희생(犧牲) 마련해야 했 기 때문이다. 그러나 1600년대 초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후 성균관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성균관의 노복들이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소고기 판매를 독점적으로 시작하였다(Song 1984). 현방에서는 소고기나 소의 내장고기 뿐만 아니라 소 에 관련된 소가죽[牛皮], 소기름[牛肪], 소뿔[牛角] 등의 부산 물을 판매해서 이익을 얻었다. 이들 판매에 따른 수입은 대 부분 성균관의 재원에 충당되었고, 일부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의 삼법사(三法司)에 세금으로 납부되었다. 그 대 가는 영업권의 보장이었으므로 거의 시전의 특권을 누리는 상인조직과 같았다고 한다. 1600년대 후반기에 부터 양반층 과 중인층을 중심으로 육류소비가 늘어나고, 일시적으로 국 가의 우금정책이 다소 완화되었다. 그 틈을 타 현방은 급속 하게 늘어 양반들과 중인들이 사는 한양의 북부, 중부 지역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설치가 됨은 물론 도성 밖의 왕십리, 태평관, 소의문 밖, 마포 등지로 확대되었다. 현방은 초기 독 점권을 이용해 많은 이익을 얻자 점차 그 운영을 지방으로 까지 확대하려 하였으나, 지방관청의 관노비들의 반발로 일 부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의 관노비들이 직접 현방을 운영하 기도 하였다(http://www.culturecontent.com). 또 종신(宗臣) 중 현방(懸房) 터를 강제로 구입하여 영입이익을 노렸다고 하여, 텃세[垈稅]를 남봉(濫捧)한 자를 파직할 상소가 올라가 기도 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영조실록 41년 2월 18일 2번째 기사).

    소고기 판매의 상권과 이권을 쥔 현방의 폐단이 많아지자 정조(正祖)는 현방에서 토색질을 하며 폐단을 부리는 자가 있으면, 궁방의 하인들은 엄한 형벌을 가하여 귀양을 보낼 것이며, 담당 중관은 내시부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지시하 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정조실록 23년 5월 27일 4번째 기사). 순조(純祖) 때 대왕대비는 “현방(懸房) 에 과세(過歲)한 뒤에는 마땅히 내시부(內侍府)에서 엄히 조 사하여 몹시 다스릴 것이니, 이후부터는 무역(貿易)은 표(標) 를 지닌 노자(奴子) 이외에는 사고파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 을 삼사(三司)의 하속(下屬)에게 분부하고, 해조(該曹)로 하 여금 죄를 범한 자는 경중에 따라서 매섭게 다스리도록 하 며, 외상 방전(外上防錢)을 일일이 찾아서 내어주도록 하라. 현방 시민의 일로 말한다면 더 중요할 수 없는 조석의 제향 (祭享) 및 화성(華城)에 보낼 물종(物種)을 철시(撤市)하였다 고 핑계하며 응납(應納)하지 않으니 이렇게 미련하고 사나운 백성의 습성을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 휼민 (恤民)하는 방도에 있어서 참작하는 정사(政事)가 없을 수 없 겠다. 만일 다시 전습(前習)의 뒤를 잇는다면, 또한 형배(刑 配)를 면치 못한다는 뜻을 세후에 비국(備局)에서 엄히 밝히 라”고 분부하였다(「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순 조실록 1년 12월 30일 1번째 기사).

    1800년대 중반 여러 지역에서 우역(牛疫)으로 소가 거의 다 죽어서 사람을 써서 밭을 갈기에 이르자 제사를 마련하 여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며, 서울에서는 마단(馬壇) 가 운데에 함께 목신(牧神)을 설치하여, 도재(屠宰)를 금하게 하 고, 서울의 현방(懸房)은 1달을 한정하여 파하게 하였다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영조실록 25년 9월 12일 1번째 기사). 1800년대 후반, 한양에서는 소고기 판매 를 둘러싸고 현방과 난전 상인, 사도자(私屠者)들이 상권 다 툼이 시작되었다. 난전의 여러 곳들에서 소고기 판매가 이루 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난전들은 소를 불법적으로 도살한 사 도자(私屠者)들과 연계하여 현방의 독점권을 무너뜨려 나갔 다. 그러자 현방은 소고기 보관에 필수적인 얼음을 독점하기 위해 빙계(氷契)를 만들며 맞서기도 하였다(Song 1985).

    현방이 내는 속전(贖錢)은 영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나라 의 경사가 있을 때 경우에 따라 10-30일 정도 탕감되기도 하 였다. 탕감의 사유는 원손(元孫)이 탄생을 축하(「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정조실록 14년 6월 24일 1번째 기 사; 순조실록 27년 7월 24일 3번째 기사; 철종실록 10권 9 년 10월 18일 1번째 기사), 조정의 안정과 경사 축하(「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정조실록 7년 4월 1일 4번 째 기사; 순조실록 1년 12월 12일 1번째 기사; 순조실록 4권, 2년 8월 21일 1번째 기사; 순조실록 2년 10월 27일 5번째 기사; 순조실록 9년 8월 15일 3번째 기사; 순조실록 19년 3 월 27일 3번째 기사), 종묘와 전(殿)·궁(宮)에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거나 가상(加上)하는 예식 진행(「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정조실록 8년 9월 18일 4번째 기사), 정월의 권농 유음을 내리고,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방면 시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영조실록 40년 12월 29일 2번째 기사; 헌종실록 5권 4년 1월 2일 2번째 기사), 70세 이상의 조관과 80세 이상의 사서들의 품계를 올릴 때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영조실록 45년 12월 27일 1번째 기사; 정조실록 18년 1월 1일 4번째 기사) 등 다양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에만도 23개의 푸줏간이 있다고 하며, 새로 만드는 푸줏간은 이곳들과 중복되지 않게 설치를 지시 하였다(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고종 12년 5월 17일). 소 를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잡는 백정을 포정(庖)src="image_2.tif">丁)이라 하였다.Sagajip (사가집, 四佳集)」(Seo 1488)에 실린 시(時) 에는 포정이 3번이나 인용되어 있으며,Baegsajip (백사집, 白沙集)」(Lee 1629)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또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사자성어가 있을 정도로 기술이 뛰 어난 소 해체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소고기의 소비가 많았 다는 것을 추측케 한다.

    소고기의 가격에 대한 내용은Haedongyeogsa (해동역사, 海東繹史)」(Han 1765~1814)에 나온다. 평안도 숙천(肅川) 과 안주(安州), 황해도 봉산(鳳山)과 황주(黃州)의 연해변에 는 거위는 한 마리에 4냥이고, 돼지고기는 한 근에 1전(錢) 2푼[分]이고, 소고기는 한 근에 7, 8푼이라고 하여, 당시 우 리나라에서는 돼지고기와 거위가 소고기보다 더 비싸게 거 래되었다. 이렇게 소고기의 가격이 더 저렴했던 이유를 Kim(2012)은 초식동물인 소의 먹이를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 라 하였다.

    4.조선의 고문헌에 나타난 중국과 일본의 소고기

    조선시대 청나라와 일본으로 간 사신들의 기록을 보면 소 고기를 유통하는 수레부터 소고기 음식, 맛의 비교가 있었다. 청나라의 기록 중 소고기를 유통하는 수레에 대한 내용이 있 다. 바퀴가 하나 달린 작은 수레를 한 사람이 밀고 다니고 (Kim「Yeonhaeongilgi (연행일기, 燕行日記)」1713), 독륜거 (獨輪車)라고 하여 한 사람이 100여 근도 넉넉히 싣는다고 하였다(Lee「Gyeongjayeonhaenjabji (경자연행잡지, 庚子燕 行雜識)」1720). 청나라에서는 도축한 소를 통째로 푸줏간에 쇠갈고리로 걸어 놓았는데, 이를 육림(肉林)이라고 표현하였 다. 하지만 소고기는 딱딱하고 깔깔해서 맛이 없다고 하였다 (Anonymous,「Buyeonilgi (부연일기, 赴燕日記)」1828).

    부잣집에서 잘 차려도 기껏해야 돼지볶음과 양고기, 돼지 고기, 소고기, 달걀을 넣어서 끓인 잡탕인 열과탕(熱鍋湯)이 나온다고 불평하기도 하였다(Kim「Yeonhaenggilgi (연행일 기, 燕行日記)」1713). 이압(李坤)은 청나라에 다녀온 사행 기록에서 호인(胡人)은 오직 재리(財利)만을 성명(性命)으로 여기어 황자(皇子)·패륵(貝勒)·각로(閣老) 이하가 모두 매 매하는 가게가 있어 개인들로 하여금 맡게 하고 있다. 지위 가 높은 자라도 시장을 지나가면 수레에서 내려 친히 사고 팔고 한다. 또 부귀한 집도 연향(宴享)·제사(祭祀)의 음식을 모두 음식 가게에서 사다가 쓰므로 원래 별다른 맛이 없다. 꿩·닭·돼지·양·오리 등을 모두 잘 삶지 못하고, 쇠고기 는 볼 수 없으나 맛이 우리나라 서북변(西北邊)의 것과 같다. 항상 조짚을 먹이기 때문에 그렇다 한다고 하였다(Lee 「Yeonhaenggisa (연행기사, 燕行記事)」1777). 이해응도 양 고기와 돼지고기는 널리 쓰이고, 소고기도 시장에 나오기는 하는데, 먹는 자가 적다고 하였다(Lee「Gyesanggijeong (계 산기정, 薊山紀程)」1804). 즉 청나라는 돼지고기나 양고기 의 이용보다 소고기의 이용은 적었고, 맛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음식의 천국, 중국은 돼지 고기, 양고기, 오리고기의 이용이 더 많다.

    일본에서도 조선의 사신들에게 소고기를 대접한 기록이 있 었다(Jo「Bongsailbonsimungyeonnok (봉사일본시문견록, 奉 使日本時聞見錄)」1748; Jo「Haesailgi (해사일기, 海槎日 記) 」1764). 하지만 조선과 마찬가지로 소는 농사짓는 데 필 요하며, 또한 신도(神道)와 불교(佛敎)를 숭상하기 때문에 소 고기를 먹지 않았지만, 서양과의 교역 이후 근력을 기르기 위해서 먹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Kim「Ildonggiyu (일동기 유, 日東記游)」1877; Lee「Ilsajiblyak (일사집략, 日槎集略)」 1881). 일본은 종교적인 이유로 1587년 이후 소고기의 식용 이 금지되었다가 1867년이 되어서야 도살장의 개설과 소고 기의 판매가 허용되었다. 300년 가까이 금지된 육식이 서구 화와 함께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소고기를 아주 먹 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우육환(牛肉丸), 반본환(返本丸), 간 우환(干牛丸)이라는 이름으로 환약으로 만들어 약으로 복용 을 하였다. 즉 상층계급에서는 육식이 아닌 약을 먹는다는 명목으로 암암리에 향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기(氣) 를 더해주고, 비위(脾胃)를 기르며, 허리와 다리 힘을 보충해 준다.’는 중국의「Bonchogangmok (본초강목, 本草綱目)」 에서 일본의 「Hwahansamjaedohoe (화한삼재도회, 和漢三 才圖會)」로 이어지는 기록이 그 정당성을 대변해주었다(Kim et al. 2014).

    5.고문헌에 나타난 소고기의 의미

    조선에서 고문헌 속에서 소고기는 상대에 대한 존경과 호 탕한 기개, 귀한 음식, 맛의 상징뿐만 아니라 벽사( 邪)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는 소고기가 조선인들의 삶에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먼저 소 염통구이인 우심적(牛心炙) 이야기이다. 우심적은 명예로운 음식이라는 의미와 사나이의 화통한 기개라는 의 미를 가져 귀한 음식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덕망이나 학식 이 높은 사람이나 지인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대접하는 음식이라는 의미이다. 「Jinseo (진서, 晉書)」<왕희지전>(644) 에는 “왕희지는 어릴 때 말을 더듬어서 아무도 특별하게 여 기지 않았다. 13세에 주의(周)를 찾았을 때에 그는 왕희지 를 특출하게 여겨 우심구이로 대접하였다. 당시 최고의 음식 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좌중의 다른 손님은 누구도 먼저 먹 은 이가 없었다.”라고 하였다(Kim 2012). 또 사나이의 화통 한 기개(氣槪)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Jinseo (진서, 晉書)」 <왕제열전>(644)에서 부호(富豪)인 왕제가 왕개의 팔백리박 (八百里駁)이라는 명우(名牛)를 자신이 한 번에 쏘아 죽이면 그 소를 가지고 그렇지 못하면 천만전(千萬錢)으로 보상한다 고 하였다. 왕제는 그 소를 한 번에 쏴 죽이고, 그 염통을 구 워서 한 점만 맛보고는 유유히 떠났다고 한다(Kim 2012).

    우심적을 인용한 문헌은 4권이 있었다. 우심적은 선비들 사이에서 귀하고 좋은 선물이었고(Kwon「Yangchonjib (양 촌집, 陽村集)」1397). 젊은 날의 부귀영화를 뜻하였다(Seo 「Sagajib (사가집, 四佳集)」1488; Jeong 「Dasansimunjib (다산시문집, 茶山詩文集)」 1800初). 김문(金汶)은 “자소탕(紫 蘇湯)이 어찌 새로 익은 술의 맛 만하며, 증계(蒸鷄)가 어찌 우심적(牛心炙) 만하랴.”라며 우심적을 새로 익은 술과 더불 어 최고의 맛으로 평하였다(Lee「Yeonryeosilgisul (연려실기 술, 燃藜室記述)」1776).

    소고기는 맛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Dongmunseon (동 문선, 東文選)」(Seo 1478),Cheongjanggwanjeonseo (청장 관전서, 靑莊館全書)」(Lee the late 1700),Imhapilgi (임하 필기, 林下筆記)」(Lee 1781)에서는 죽순, 복어, 물고기의 맛 을 소고기와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다고 하여 비교하였다. Songjadaejeon (송자대전, 宋子大全)」(Song 1787)과 「Bacghojeonseo (백호전서, 白湖全書)」(Yun 1617~1680)에 서는 입맛을 기쁘게 한다 하였다. 이처럼 소고기는 보편적인 ‘맛있다’의 대명사로 쓰였다. 아무 간도 하지 않아 담백한 소 고기 국인 태갱(太羹)을Hongjaejeonseo (홍재전서, 弘齋全 書)」(Jeongjo, 1799)에서 “주자(朱子)의 시는 모든 성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모으고 지극히 어진 도덕의 윤택함을 집 으로 삼았다. 난초가 그윽한 산속에 자람에 세한(歲寒)의 맹 서가 있다. 얼음은 일만 골짜기에서 나옴에 청철(淸澈)한 기 상이 있다. 포백(布帛)과 숙속(菽粟)은 일용(日用)의 실질(實 質)이 있고, 태갱(太羹)과 현주(玄酒)는 소박한 맛이 있는 것 과 같으며.....”라고 비유하였다.

    소고기는 벽사(辟邪)의 수단으로도 쓰였다.Seongdamilgi (석담일기, 石潭日記)」(Lee 1581)Yeonryeosilgisul (연 려실기술, 燃藜室記述)」(Lee 1776)에서 서울과 팔도에 전염 병이 크게 번져서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소문에 독한 역질 귀신을 막기 위해 꼭 소고기를 먹고, 소피를 문에 뿌리 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무수히 많은 소가 도축되 어야 했다.Seonghosaseol (성호사설, 星湖僿說)」(Lee 1681 ~1763)에서 소고기는 저주의 수단이 되었다. 사람이 소고기 나 양고기를 먹은 뒤에 따라서 저주하면, 그 익은 고기가 날 것으로 변하고 날것이 산 것으로 변한다. 처음에 작던 것이 큰 것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완연히 소나 양의 참모습이 되 어서 배를 트고 나온다고 하였다.「Ilseongnok (일성록, 日 省錄)」에는 순천(順天)에 사는 김성탁(金成鐸)은 ‘아비 김광 옥(金光沃)은 병신년(1776)에 같은 리(里)의 문재형(文再亨) 과 서로 다툰 일이 있었는데, 문재형이 철추(鐵錐)를 조모(祖 母)의 분묘에 꽂는가 하면 쇠고기 국물과 가루로 만든 사람 뼈를 합하여 물에 타서 분묘에 뿌렸습니다. 부디 도신(道臣) 으로 하여금 저주(咀呪)한 죄를 엄히 조사하여 형률대로 감처 (勘處)하게 하소서.’라고 상소하였다. 이렇게 소고기는 역질 귀 신을 막거나 저주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였다(Ilseongnok (일성록, 日省錄)」 정조 12년 4월 4일).

    IV.요약 및 결론

    조선시대 소고기가 기록된 64권의 고문헌과 그림자료, 그 리고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조선왕조실록, 朝 鮮王朝實錄)」,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Ilseongnok (일성록, 日省錄)」등의 관찬 자료를 통하여 우리나라 소고 기의 역사와 조선인들에게 소고기는 어떤 의미였으며, 어떻 게 활용하였는지를 비교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소고기는 존경과 호탕한 기개, 귀한 음식, 맛의 상징뿐만 아니라 미신의 매개체로 쓰였다. 금육의 시대 고려를 벗어난 조선인들은 소고기 맛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앙 정부에서는 소고기에 대한 탐식으로부터 농우(農牛)를 보호 해야 했다. 우금령(牛禁令)은 조선의 전 시기에 걸쳐 내려졌 다. 위반 시 경범죄부터 중하게는 태형, 국문(鞫問), 파직, 체 포, 유배가 가해졌다. 소고기는 가장 귀하고 맛있는 음식으 로 제수와 대접에서 빠지지 않았으며, 하사(下賜)와 호궤 (犒饋)용으로 단연 으뜸이었다. 연행일기를 통하여 중국과 일본에서 맛본 소고기의 맛과 소고기 유통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금욕과 탐욕의 아이콘이었던 소고기는 조선시대 예(禮)의 상징이며, 기쁨과 치유의 수단인 동시에 금단의 열매로 우리 의 조상들과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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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olhuyayeon (雪後野宴) <Kim Hong-do, Collection of France Guimet Muse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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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yeon (野宴) <Seung hyoep, National Museum of Korea>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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