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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31 No.6 pp.541-553
DOI : https://doi.org/10.7318/KJFC/2016.31.6.541

Study on Use of Mung Bean Porridge Reported in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Joo Young Park1, Hyang Young Lee1, Jin Chul Lee1, Sang Woo Ahn2*
1Department of Medical History, Graduate School of Korean Medicine, Kyung Hee University
2Korea Institute of Oriental Medicine
Correspondence to: Ahn Sang Woo, Korea Institute of Oriental Medicine, 1672, Yuseong-gu, Daejeon, Republic of Korea 82-42-868-944282-42-868-9458answer@kiom.re.kr
September 30, 2016 November 2, 2016 December 7, 2016

Abstract

Medicinal porridge (藥粥) is made by putting rice or grains into a pot and boiling with water until a semi-liquid texture is obtained. Porridge is digested fast and absorbed by the body. Children or elderly people with weak digestive ability can eat it without difficulty. The authors of this literature focused on utilization of mung bean porridge (Nokdu-juk) based on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 which is the daily record of the Royal Secretariat of the Joseon Dynasty from 1623 to 1910. Four cases were found. The first case used mungbean for treating fever diseases (熱症), the second as a meal alternative, the third for wound recovery, and the last case described the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According to the actual cases in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 mung bean porridge (Nokdu-juk) was actively used to lower fever and strengthen the spleen and stomach. When suffering from the after effects of a malignant tumor or serious liver disease (肝 病), an infectious disease, or a serious physical wound, people ate mung bean porridge (Nokdu-juk). It is suggested that mung bean porridge (Nokdu-juk) can be used as an alternative food treatment for the current medical field due to the prevalence of pain-killers and psychotropic drug abuse.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녹두죽 활용에 대한 고찰

박 주영1, 이 향영1, 이 진철1, 안 상우2*
1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대학원 의사학 교실
2한국한의학연구원

초록


    Korea Institute of Oriental Medicine
    G16110

    I.서 론

    우리 민족은 신석기 시대부터 조, 피, 수수 등을 재배하는 농경 생활을 하였고,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곡류를 주식으로 삼아왔다. 곡물을 사용하는 여러 음식 형태 중 하나인 죽(粥)은 곡물에 물을 붓고 끓여서 반 유동식의 상태로 만든 음식이며(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1994) 소화 흡수가 빠르다. 또한 이러한 음식의 형태 로 인하여 위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에, 소화력이 약한 소아나 노인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고, 속이 좋지 않아 식 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움직이지 못하여 누워 있는 환 자의 경우 죽은 약효가 잘 흡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 보조제가 될 수 있다. 소아나 노인이 죽을 섭취 할 시에 영 양분을 편안하게 잘 흡수 시킬 수 있으며, 환자가 죽을 먹을 때는 질병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

    녹두의 성질과 약성에 대해 DonguiBogam (東醫寶鑑) (Kim GJ ed. 2005)에서는 “성질은 차고 맛은 달며 독은 없 다”고 하였다. 또한 정조 대 강명길(康命吉)이 저술한 Jejoongshinpyeon (濟衆新編)(Lee SD ed. 1992) 제8권 약성가(藥性歌)에는 다양한 본초의 효능이 8언 절구의 형태 로 담겨있는데 새롭게 증보된 내용은 주로 곡물들로서 음식 물과 관련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 이다(Lee& Ahn 2009).Jejoongshinpyeon (濟衆新編)(Lee SD ed. 1992) 제8권 약성가(藥性歌)에 있는 약재 중 녹두(綠 豆)를 찾아 볼 수 있는데 “녹두는 성질이 차고 여러 독을 해 독하며 가슴이 답답하고 갈증이 나는 증상과 모든 열증을 다 스린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그리고 고종 대 황도연(黃度淵) 의Bangyakhappyeon (方藥合編)(Choi OJ ed. 1991)에서 는 녹두의 가루는 여러 가지 약독을 없애는데 두창으로 진 물이 흐를 때는 이를 뿌려주며 껍질은 열을 내리고 눈병을 물리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효능을 가진 녹두를 죽의 형태로 만들어서 복 용하게 하면 소아, 노인, 환자와 같은 소화기능이 좋지 않으 며 열성질환이 있는 사람이 위장에 부담 없이 녹두를 소화 흡수하여 소화 시간이 단축되면서 해독과 해열의 효과도 함 께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불어 녹두는 우리 주변 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곡물이므로 더욱 그 활용가치가 높 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연구의 대상으로 녹두죽을 선택하였다.

    죽에 관한 선행논문은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 를 중심으로 조선 왕실의 식치법과 특징에 관한 연구(Kim 2016),Euibangyoochui (醫方類聚)식치편에 수록된 죽의 약선 식료학에 관한 연구(Kim 2011),Yang-lo-bong-chin-seo (養老奉親書)를 중심으로 노인식이양생을 위한 약선죽에 관한 연구(Kim et al. 2013) 등이 있으며, 녹두죽에 대한 선 행연구로는 녹두 첨가량을 달리한 녹두죽의 품질특성에 관한 연구(Choo 2014)이 있다. 녹두죽의 관한 논문 중 녹두 자체 의 약성을 이용한 음식 연구는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연유로, 조선 왕실의 기록 유산인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의 임상 사례에 나타난 녹두죽의 의학적 활 용을 살펴보게 되었다.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 는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의 문서와 사건 을 기록한 일기로, 왕의 건강과 질병 및 치료에 관해서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Cha 2013). 또 아 침 식전 또는 후, 점심 이후, 저녁 식후(잠들기 전) 등 매일 3~4회(식사 전후) 그리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때는 더욱 빈번하게 질병 상태나 음식 섭취 등에 대한 기록과(Lim et al. 2013) 한의학 고전 의서와는 다르게 녹두죽을 섭취한 후 환자의 증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연구 자료이다(Jung 2016). 본고에서는 녹두의 의학적 약성에 대해 알아보고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안의 녹두죽을 사용하였 던 사례를 조사하여 어떤 질병을 앓아 녹두죽을 먹었는지, 또 녹두죽을 섭취한 이후 증상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파악하 여 녹두죽이 단순한 영양식이 아니라 치료 효과를 갖는 음식 이라는 점을 역사기록을 통해 문헌적으로 입증하고자 한다.

    II.연구 내용 및 방법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는 유실되어 없어지지 않고 현존하는 궁중의 구체적인 임상 기록 데이터로 현재에 서도 연구할 가치가 높은 기록 유산이다. 본고는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에서 인조 원년(1623년) 3월부터 순종 4년(1910년) 7월까지의 “녹두죽(菉豆粥)”에 대 한 기록을 검색하였다. 그 결과, 인조, 효종, 숙종, 영조, 순 조, 헌종, 철종, 고종 총 8대에 걸쳐 168건의 녹두죽에 관한 기사를 찾았고, 이 결과물을 추려 시간 순서대로 표로 정리 하여 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다음 작업으로 168건의 기사를 토대로 어떤 질병을 앓 았을 때 녹두죽을 먹었으며, 어떤 목적을 갖고 녹두죽을 먹 었는지에 관하여 총 3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분류하였다. 녹두죽을 섭취한 이유와 섭취 후 변화에 대한 기록을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의 임상 사례를 중심으로 어떤 질병을 앓았는지, 어떠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녹두 죽을 먹게 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질병의 증후와 예후는 한 의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였고 이를 토대로 녹두죽이 우리 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영양식으로만 활용된 것이 아니라 치 료 효과적인 측면에서도 활용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III.결과 및 고찰

    1.의서에 기록된 녹두의 의학적 약성과 효능

    녹두의 귀경에 관하여 명대 Herbal medicine (本草學)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Medicine University Editors 2004)에서는 “心胃經이다.”라고 하였다. 족양명 위경은 장(腸) 위(胃) 등 소화기계통 질환, 신경정신계 질환, 호흡 순환계 병증, 인후(咽喉), 두면(頭面), 구(口), 치(齒), 비(鼻) 병증 몇 위경(胃經)이 경과하는 부위의 병증으로 특히 소화기 계통 증상 및 구안와사(口眼斜), 인후종통(咽喉腫痛), 비뉵(鼻), 치 통(齒痛), 슬빈동통(膝疼痛) 등 경맥순행부위동통을 주치한 다. 수소음 심경은 흉심질환, 순환계병증, 신경정신질환 및 심경(心經)이 경과하는 부위의 병증으로 특히 심통(心痛), 심 번(心煩), 불면(不眠), 인건(咽乾), 구갈(口渴), 안황(眼黃), 협 통(脇痛), 수비내측통(手臂內側痛), 수심발열(手心發熱) 및 신 지병(神志病)을 주치한다(Son et al. 2003).

    이처럼 녹두는 성질이 차기 때문에 양명(陽明) 위경(胃經) 에 들어가 내상으로 인해 생긴 위(胃)의 열을 꺼주며, 심경(心 經)에 들어가 신경성,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심(心)의 열을 꺼주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녹두의 약효와 주치는 명대 이시진(李時珍)(1518~1593년) 의Compendium of Materia Medica (本草綱目)(Beijing Yangseongsan publishing company ed. 2010)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독번열(丹毒煩熱), 풍진(風疹), 약석발동(藥 石發動), 열기분돈(熱氣奔豚)을 치료하며 신선한 것은 갈아서 짠 즙을 복용한다. 또 끓여 먹으면 부기를 가라앉히고 하기 (下氣)하며 열을 내리고 해독하는 효능이 있다. 베개에 넣고 자면 눈을 밝게 하고 신경성 두통을 치료한다.”

    조선시대의 서적에서 녹두를 죽으로 만들어 사용한 것을 살펴보면 세조대의 전순의(全循義)가 편찬한 한국 최고(最古) 의 식이요법서인Sikryochanryo (食療纂要)(Kim JD ed. 2006)에서는 “기를 가라앉히고 열을 누르려면 녹두를 삶아 먹는다.”고 하였다.

    또한 서유구(徐有)(1764~1845)가 지은 생활대백과사전인 ImwonGyungjaeji (林園經濟志)(Joe EJ ed. 2007)에는 녹 두죽을 만드는 2가지 방법이 나온다. “생강을 끓이고 건져낸 물에 꿀을 넣은 다음 거기에 녹두를 삶고 멥쌀을 찧어 낸 가 루를 넣어 섞어서 죽을 쑨다. 다른 방법으로는 녹두를 물에 불려 곱게 갈아 가라앉힌 후 윗물은 버리고 남은 앙금을 말 려 저장해 두었다가 오미자 물에 녹두가루를 넣고 죽을 쑤 어 꿀을 타먹는다.”고 하였다.

    황도연(黃度淵)이 저술한Uijongsonik (醫宗損益)(Hwang Doyeon (黃度淵), 1868)에는 녹두죽을 녹두음(綠豆飮)이라고 하면서 그 효능과 복용법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그 효능에 대하여 “열독(熱毒)과 노열(勞熱) 등의 여러 가지 화열(火熱) 이 심한 것을 치료한다.”고 하였으며 죽을 만들고 먹는 방법 에 대하여 “적당한 양의 녹두를 물에 넣고 끓여서 죽으로 만 든 다음 소금을 조금 넣어서 먹거나 혹은 꿀을 넣어서 먹기 도 한다. 차갑게 먹거나 뜨겁게 먹기도 하고, 묽게 먹거나 되 게 먹거나 마음대로 하루 3~4번까지 먹어도 된다.”고 하였 다. 그리고 녹두의 효능에 대하여 “녹두는 그 성질이 고한(苦 寒)하지 않아서 비기(脾氣)를 상하지 않으면서 독을 잘 풀어 주고 번열증을 없애며, 열을 내리고, 갈증을 멈추며, 대소변 을 잘 나가게 하니 이는 쉽게 구할 수 있으나 효과가 아주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마지막으로 “만약 화가 성할 때는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데 녹두를 반숙이 될 정로만 삶아서 그 맑은 물을 식혀서 마시면 번열증이 없어 지고 화를 내린다.”고 하면서 녹두를 살짝 삶아서 그 맑은 물을 마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녹두의 성분 중 단백질(蛋白質) 24.81%, 조섬유(組纖維) 4.75%, 조회분(組灰分) 4.17%, 당질(糖質) 46.04%이고 특히 녹두는 지방함량이 0.82%로 두류(豆類)로서는 극히 미량을 함유하고 있다. 녹두 단백질은 라이신(lysine)이 8.33%, 트레 오닌이 3.5% 함유되어 다른 곡류 단백질에 비해서 비교적 양질의 단백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함황(含黃) 아미노산 을 적게 함유하는 것이 대두(大豆)와 유사하다. 녹두의 지방 질은 팔미트산(37%), 리놀레산(35.5%) 및 리놀렌산(15.5%) 이 거의 90%를 차지하고 있고 여기에 올렌산(5.6%)과 스테 아르산(5%)을 합하면 전체의 98.6%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 지 1.4%는 미리스트산, 아라키돈산, 베헨산 등으로 되어 있 다(Kim et al. 1981).

    이를 종합해보면, 녹두의 맛은 달고 성질이 서늘하며, 그 귀경은 위경(胃經)과 심경(心經)이다. 양명(陽明) 위경(胃經) 은 내상(內傷)을 입어 약해진 위장의 소화흡수 작용과, 심경 (心經)은 신경성으로 인해 심해진 심열(心熱)과 관련이 있다. 녹두를 멥쌀과 함께 끓여서 쑤어 만든 죽의 형태로 섭취하 게 되면 붓기를 가라앉히고 열을 내려주며 해독 작용을 하 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속의 녹두죽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에서 인조 원년(1623년) 3월부터 순종 4년(1910년) 7월까지의 168건의 “녹두죽(菉豆 粥)”에 관한 기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표로 정리해보았다 <Table 1>.

    녹두죽에 관한 기사는 인조, 효종, 숙종, 영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대에 걸쳐 두루 나타났으며 녹두죽을 먹었던 인 물들도 다양하였다. 그 중 인현왕후가 녹두죽을 복용한 사례 가 119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은 숙종이 녹두죽을 복 용한 사례가 28건으로 그 목적은 모두 청열(淸熱)이었다.

    이 표를 바탕으로 열성 질환에 녹두죽을 사용한 사례, 조 선 왕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녹두죽의 사용 사례, 녹두죽 을 사용한 기타 사례 총 3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서 다시 정 리해보았다. 또한, 각각의 카테고리에 해당하는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의안의 사례와 역사적, 정치적 사건을 추 가하였다.

    1)열성 질환에 녹두죽을 사용한 사례

    (1)인목대비가 녹두죽을 복용한 기록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은 즉위 후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그 모친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다. 인목대 비의 나인이 저술한 조선 3대 궁중 서적GyechukIlgi (癸 丑日記)(Park 2014)에는 그 당시 인목대비가 겪었던 고초 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서궁에 유폐된 후 대비와 그 나인들 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한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좋 은 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광해군 15년(1623년) 서인 이귀(李貴) 등이 살제폐모(殺第 廢母) 사건을 명분으로 일으킨 인조반정이 성공으로 인조가 즉위하고 인목대비는 대왕대비로 복권되었다. 인목대비는 서 궁에 유폐되었을 때 받았던 스트레스와 화병으로 인한 열증 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 9년(1631년) 1월 21일(을미)

    侍藥廳啓曰, 伏聞去夜, 熱勢甚盛, 至於屢度升降云, 此時症 候, 何如? 進御藥物, 不可不勉進粥飮以實元氣.接命膏, 最有淸 熱補胃之功, 頻頻勸進爲當.答曰, 此時症候, 面熱勞困矣.二品 以上問安.答曰, 四五更間, 淸心元進御, 昧爽, 菉豆粥進御, 而 嘔吐矣.

    인조 9년(1631년) 1월 23일(정유)

    臣等會同李惟聖諸醫官及柳後聖商議, 則皆以爲消散腫熱, 無 良於針, 若時施針, 則可以止成膿之勢, 雖或不能止成膿, 猶可 消散熱氣, 減却痛勢云, 而第未知內間事勢, 不敢斷然上請矣.答 曰, 啓辭甚當, 依爲之.慈殿受針後, 二品以上問安.答曰, 一樣.受 針後, 菉豆粥進御矣.

    인조 9년(1631년) 1월 21일(을미) 인목대비의 얼굴에서 열 감이 보여 청열(淸熱)을 위해 청심원과 녹두죽을 함께 먹었 으나 구토하였고, 열감이 다시 올라왔다.DonguiBogam (東 醫寶鑑)(Kim GJ ed. 2005)에는 “상한열병으로 번갈이 나 는 것을 치료한다. 녹두죽을 쑤어 늘 먹는다.”라고 되어 있 으니, 녹두죽을 상복하면 열을 내리는데 도움이 됨을 알 수 있다.

    2일이 지나자 인목대비의 인후와 목덜미에 종기가 생겨 외 과적인 침 시술로 종기를 제거하고 녹두죽을 먹었다. 인후의 통증은 비슷하였지만, 변이 부드러워지고 두통이 감소하였다.

    인조 10년(1632년) 6월 8일(갑술)

    政院, 大妃殿問安.傳曰, 三更熱上, 菉豆粥淸心元進御, 寢睡 則或寢或覺, 泄瀉則三巡, 欲明時, 白粥水少許進御矣.

    인조 10년(1632년) 6월 8일(갑술) 인목대비에게 발열과 설 사 증세가 다시 나타났고, 대비는 청심원과 녹두죽을 복용하 였다.

    인목대비가 인조 9년(1631년) 1월과 인조 10년(1632년) 6 월에 각각 발열과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녹두죽을 복용한 기 록을 표로 정리하였다<Table 2>.

    (2)인조와 경종이 녹두죽을 복용한 기록

    인조 5년(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강화도 피난생 활은 인조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인조는 거의 재위기간을 통틀어 한열의 증상을 앓았는데 이 러한 인조가 앓은 발열과 오한의 반복과 같은 증상들은 그 의 정신 상태에 의한 것이었다(Kim 2013).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인조에 나타난 증상은 번(煩)과 한열(寒熱)이 대표 적이다. 거의 재위 기간을 통틀어 인조는 한열의 증상을 앓 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조의 한열 증상은 23년(1645 년) 이후 열증 이후로 변화되었다(Kim et al. 2012).

    인조는 비위 기능이 좋지 않아 약죽으로 증상의 치료 효 과를 높이고 비위를 보호하는 등 약죽의 활용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Lim et al. 2013).

    인조 10년(1632년) 6월 3일(기사)

    侍藥廳夕問安.答曰, 昨日午間, 熱暫止矣, 自夕熱氣又重, 夜 間寢睡不安, 牛黃膏進御, 雪水和菉豆粥進御矣.

    인조는 인조 10년(1632년) 6월 저녁에 열기가 심해지는 번 증(煩證)을 해결하기 위해 납설수(臘雪水: 섣달그믐께 온 눈 을 녹인 물)를 탄 녹두죽을 복용하였다.DonguiBogam (東 醫寶鑑)(Kim GJ ed. 2005)에 “납설수의 성질은 냉하고 맛 은 달며 무독하고 돌림병, 온역, 술을 마신 뒤에 갑자기 열 이 나는 것과 황달을 치료하고 온갖 독을 풀어준다”고 나온 다. 또한, 광해군 5년(1613년) 허준이 왕명을 받아 온역(瘟 疫: 역병)의 치료를 위해 편찬한Shinchanbyeokonbang (新 撰瘟方)(Ahn SW ed. 2012)에는 “유행성 온역으로 열이 성할 때 납설수를 구해 마시면 가장 큰 효험을 본다.”라고 하였다. 납설수가 전염성 역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되듯이, 인 조는 성질이 찬 납설수와 녹두죽을 복용하여 해독하고 청열 (淸熱)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숙종 19년(1693년) 2월 1일(을해)

    再啓曰, 卽伏聞入診醫官所傳之言, 王世子左邊下浮高之處, 微赤且熱, 按之作痛, 卽消散, 有未可必, 臣等伏不勝憂慮之至, 仍與崔聖任權愉崔有泰白光炫等諸醫相議, 則皆以爲消毒膏, 貼 付常處, 金銀花煎茶, 調牛黃豆粥和胎水, 相間連進, 癰疽門荊 防敗毒散, 加牛子炒黃芩酒炒, 各一錢, 五貼, 令乳母日再服, 以 爲淸熱消毒之地, 宜當云, 此藥竝劑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재위 동안 은 노론과 소론 당쟁의 절정기였으며 후사가 없었고 병약하 였다. 숙종 19년(1693년) 2월 1일(을해) 왕세자였던 경종의 좌측 턱과 뺨이 부어있는 증후가 나타났다. 당시 6세의 소아 였기 때문에 강하고 쓴 맛의 탕약을 활용하기 힘들어서 약 죽(藥粥)으로 치료를 대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의들은 왕 세자의 좌측 턱과 뺨의 부종(浮腫)을 풍열(風熱)로 보고 이 풍열(風熱)을 꺼주는 금은화차와 녹두죽을 복용하였다. 녹두 는DonguiBogam (東醫寶鑑)(Kim GJ ed. 2005)에서 “성 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은 없으며 일체의 단독, 번열, 풍진 과 광물성 약기운이 동한 것을 치료하는데 열을 내리누르고 부은 것을 삭히며 기를 내리고 소갈증을 멎게 해준다.”고 하 였다.

    인조와 경종이 각각 청열해독(淸熱解毒)을 목적으로 녹두 죽을 복용한 사례를 표로 정리해보았다<Table 3>.

    (3)인현왕후가 녹두죽을 복용한 기록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에서 녹두죽은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 대에서 148건으로 가장 많이 검색되었다. 인현왕후가 겪었던 주 증상으로는 嘔吐, 隔滯, 脚痛 등이며 특히 여름철이 되면 暑熱의 증세가 함께 나타났다. 그 차별 점으로는 녹두죽 외 약죽(藥粥), 약주(藥酒)도 많이 활용하였 다는 점이다.

    인현왕후 민씨는 왕통을 이을 아들을 두지 못하자 숙종에 게 후궁 두기를 권하였고, 숙종은 숙의 김씨를 후궁으로 들 였으나 김씨도 아들을 낳지 못한다. 결국 장희빈이 아들을 낳음으로써 인현왕후는 크게 기뻐하고 친자식처럼 사랑하였 지만 장희빈은 자신의 욕망 성취를 위해 인현왕후를 참소 한 다(Kim 1995). 인현왕후는 안동 본가에서 내외문을 폐쇄하 고 궁인 1명과 따라 나온 궁인 3명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시 작한다. 형제도 귀양하고 친모(親母)만 남아 아침과 저녁 수 라도 거절하고 근신하였다. 부원군 상을 마치니 더욱 슬퍼하 여 심신이 많이 상하였다(Du 1984).

    숙종 20년(1694년) 4월 폐비 민씨는 왕후로 복위하였다. 숙종 26년(1701년) 3월 26일 처음으로 환도혈 주변의 통증 이 시작되었다. 숙종 26년(1701년) 4월 14일 다리부터 경련 이 시작되었고, 이 경련은 전신의 경련으로 이어진다. 숙종 26년(1701년) 5월 12일 통증이 있었던 종기에서 화농이 시 작된다. 화농기가 지나자 숙종 26년(1701년) 6월 말부터 복 통, 구토, 설사 증세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숙종 26년(1701년) 7월 24일(을묘)

    藥房啓曰, 伏未審夜來, 聖體, 若何? 中殿症候, 昨日醫女入 診後來傳, 膿汁連得多出, 神氣困, 比前益甚云, 故五錢重蔘茶, 卽爲煎入矣.自初昏連有惡心之候, 連進蔘茶羌茶湯[蔘茶薑茶湯 ], 而不得鎭定, 三次嘔吐, 元氣益復危, 若不能收拾, 三更後, 少 得鎭定, 進菉豆粥二合, 始爲入睡, 而或睡或覺, 不得安寢, 曉後 進湯少許, 旋又嘔吐云.

    숙종 26년(1701년) 7월부터 녹두죽을 복용하여 손상된 비 위(脾胃)를 다스리고 보호하였다.

    숙종 27년(1702년) 2월 19일(정축)

    藥房啓曰, 伏未審夜來聖體, 若何? 三里穴受灸, 今日爲之事, 旣已稟定矣.時刻定以何時乎? 中宮殿症候, 伏聞醫女所傳之言, 昨日所進, 水刺七合, 菉豆粥一升四合, 夜間微有熱候, 金銀火 [花] 茶, 調進牛黃二分, 脚部痛候, 一樣無減, 寢睡亦未得安穩 云.脚部痛候之添重, 今已多日, 尙無減歇之勢, 臣等不勝悶慮之至.

    인현왕후의 병명은 옹저(癰疽) 즉 악성 종기였다. 숙종 27 년(1702년) 2월 왕후는 악성 종기의 치료를 위해 엉덩이와 다리 부위에 뜸을 뜨고 녹두죽을 복용하였다.

    숙종 27년(1702년) 3월 2일(기축)

    藥房啓曰, 伏未審夜來, 聖體, 若何? 中宮殿症候, 伏聞醫女 來傳之言, 昨日所進, 水刺三合, 米飮六合, 菉豆粥七合, 夜間寢 睡, 煩轉不安, 金銀花茶, 調進牛黃二分, 脚部環跳穴近處痛勢 乍歇, 而氣沖穴近處, 又爲作痛, 左邊脚部, 亦有微疼之候云.痛 處則隨其發作, 觀勢施針, 而加味人蔘茶, 連次煎入矣, 敢此問 安.答曰, 知道.無事.

    같은 해 3월부터는 통증이 있는 부위에 침 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관찰하였고 녹두죽을 복용하였다. 녹두죽은 뜸, 침, 훈증 요법 시행 시 치료 보조제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원래 대로라면 고름이 제거되고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어 회복기 를 거쳐야 했지만, 고름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그 합병 증으로 인현왕후의 구토가 점차 심해져 탕약과 수라를 제대 로 먹지 못하였다.

    인현왕후는 시간이 갈수록 탕약 외에도 약차(藥茶)와 약주 (藥酒) 및 죽(粥)과 같은 식치(食治) 처방이 빈번하게 올려 지 기도 하였다(Pahng et al. 2012). 약죽의 효능에 따라 한 가 지 약죽(藥粥)만 사용하기보다 여러 약죽(藥粥)을 나누어 함 께 섭취하는 것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영양학적으로 더 큰 효과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Jung 2016). 인현왕후가 녹 두죽 외에 추가적으로 함께 복용한 죽과 술은 다음과 같다.

    숙종 27년(1702년) 5월 4일(경인)

    藥房啓曰, 伏未審夜來, 聖體, 若何? 中宮殿症候, 伏聞醫女 來傳之言, 昨日所進水刺七合, 菉豆粥三合, 粟米飮三合, 夜間 寢睡稍安云 加味蔘茶及粟米飮, 依前煎入矣, 敢此問安.答曰, 知 道.無事矣.

    숙종 27년(1702년) 5월 20일(병오)

    藥房啓曰, 旱炎比酷, 伏未審夜來, 聖體, 若何? 中宮殿症候, 伏聞醫女來傳之言, 昨日所進水刺一升五合, 菉豆粥四合, 夜間 微有煩虛之候, 金銀花茶調進牛黃二分, 而寢睡則頗得安穩云, 頃日以姑觀一兩日, 更議湯劑啓達矣.諸御醫等, 以爲卽今寢膳 之節, 幸得少安, 苦口湯劑, 不必繼進, 仍爲姑停宜當云, 神聖 酒, 連次進服矣, 敢此問安.答曰, 知道.無事矣.

    숙종 27년(1702년) 7월 9일(갑오)

    藥房啓曰, 伏未審夜來, 聖體, 若何? 中宮殿症候, 伏聞醫女 來傳之言, 昨日所進, 菉豆粥七合, 薏苡粥五合, 養元粥三合, 湯 藥分二巡進御, 人蔘麥門冬茶, 向夕進服, 夜間寢睡, 乍睡乍覺, 不得全安, 腹中不平之候稍減, 而胸膈滯之症, 一樣無減云.

    숙종 27년(1702년) 8월 7일(임술)

    議藥廳啓曰, 伏未審夜來, 聖體, 若何? 中宮殿症候, 伏聞醫 女來傳之言, 昨日所進, 養元粥五合, 菉豆粥三合, 御米粥二合, 蔘茶兩巡進御, 夜間寢睡稍安, 大便度數頗減云, 蔘茶依前煎入 矣, 敢此問安.

    인현왕후는 숙종 27년(1702년) 5월부터 속미음(粟米飮: 좁 쌀로 쑨 미음)과 신성주(神聖酒)를, 7월부터 양원죽(養元粥: 멥쌀과 찹쌀을 섞어서 쑨 죽), 의이죽(薏苡粥: 율무죽)을, 8월 부터 어미죽(御米粥: 푸른 대를 태운 진액에 양귀비씨를 탄 다음 멥쌀을 넣어서 쑨 죽)을 복용하였다. 진통 효과가 강한 양귀비씨를 탄 어미죽은 생명이 위중하고 통증이 극심할 때 녹두죽과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망하기 전까지 위장의 기운을 회복하고 구토와 설사가 감소하면서 잠자리는 편안해졌다. 하지만, 다리의 통증은 비 슷하였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정신이 혼미해지고 식은땀이 나 면서 위중한 상황에 이른다. 숙종은 지난날을 후회하고 중전 의 걱정을 염려하였지만(Du 1984), 숙종 27년(1701년) 8월 14일(갑술) 인현왕후는 의식을 잃고 호흡곤란으로 고통 받다 가 끝내 사망한다. 인현왕후가 숙종 26년(1700년) 7월부터 숙종 27년(1701년) 8월까지 찬 성질의 녹두죽을 섭취하여 열 기, 가슴 답답함, 갈증 등을 해소하려 했던 기록을 표로 정 리하였다<Table 4>.

    (4)숙종이 녹두죽을 복용한 기록

    조선 19대 임금 숙종은 숙종 9년(168년) 두창을 처음 앓았 다. 20대 후반부터 심화(心火) 증상을 호소하였고 40대 이후 숨쉬기가 곤란한 증상이 꾸준히 나타나고 56세는 심장질환 으로 발전하였다. 사망 전 복부가 팽창하고 정신이 혼미한 증상을 보였으며 이는 간경변, 간성혼수의 증상으로 해석하 고 있다(Lee & Kim 2006).

    숙종이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에서 녹두죽을 복용한 기록은 총 28건이다. 어릴 때부터 열성 질환을 앓고 있었던 숙종이 말년에 청열(淸熱)의 목적으로 녹두죽을 복용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35년(1709년) 7월 16일(을유)

    有鉉曰, 症候不過外傷暑風, 尙未消減之致, 而水刺之厭進, 最 爲悶迫, 湯劑進御之後, 如菉豆粥米飮, 頻頻進御, 何如? 上曰, 卽今則湯藥粥飮, 俱難進服矣.濡曰, 臣等與諸醫退出, 議定當進 之藥, 仍卽煎入之意, 敢達.

    숙종 39년(1713년) 12월 26일(기해)

    答曰, 知道.困惱之候, 一日之內, 加減無常, 口淡熏熱膈痰煩 渴一樣, 寢睡比昨差勝, 而夜中進菉豆粥少許, 核處膝痺, 別無 加減矣.

    숙종은 숙종 35년(1709년) 7월 여름 감기로 인한 가슴 답 답함과 가래 증세로 녹두죽을 복용하기 시작하여, 숙종 36년 (1710년) 1월까지 녹두죽을 섭취하였다. 숙종 39년(1713년) 12월부터 무릎 저림과 갈증 때문에 녹두죽을 다시 복용하기 시작하였으나 무릎, 다리 저림은 비슷하였다. 숙종은 45년 (1719년) 10월 아들 연령군이 사망한 이후 급격히 몸 상태가 악화되었다.Gugyeoknangyeong (國譯難經)(Keum GS, Song JC ed. 2015)에는 “간(肝)이 병들면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다. 평소 화 를 잘 내는 다혈질 성향의 숙종은 간(肝)에 병(病)이 든 지 오래였다. 간병(肝病)이 더욱 악화되어 대소변이 나오지 않 으며 복수가 차게 되고 복부가 더욱 팽창하여 배꼽이 튀어 나오게 된다. 식사는 미음이나 죽 몇 숟가락 밖에 하지 못하 였다.

    숙종 46년(1720년) 3월 11일(무인)

    藥房口傳啓曰, 伏聞入侍醫官所傳之言, 則今日昏沈之候有 加, 而菉豆粥二合進御之後, 更無所進云, 以此似難經夜, 雜水 刺煮汁, 從優加進伏望, 此時則昏沈之候, 更何如? 惶恐敢啓.傳 曰, 知道.

    숙종 46년(1720년) 4월 5일(신축)

    臣等, 與諸醫商議, 則皆以爲, 赤小豆炒一合, 蔓荊子炒二錢, 檳一錢劑進宜當云.臣等, 卽爲劑煎先嘗, 則其味不苦, 可以進 御, 故今方煎入, 而午間水刺, 僅一匙外, 無他進御之物, 白粥或 菉豆粥間, 更爲從優强進伏望, 惶恐敢啓.

    숙종 46년(1720년) 3월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하였고 4월에 복부팽만감,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 호흡이 고르지 못한 증상이 나타나 숙종 46년(1720년) 6월 6일(신축)까지 녹두죽을 섭취하였다.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숙 종 46년(1720년) 4월 숙종이 녹두죽과 적소두차를 함께 복 용하는 대목이 나온다.Compendium of Materia Medica (本 草綱目)(BeijingYangseongsan publishing company ed. 2010)을 보면 “부기를 가라앉히며 두(痘)를 고치는 힘은 녹 두와 적소두가 같지만 열을 내리고 해독하는 힘은 녹두가 적 소두보다 강하다. 또 익기하며 장위를 튼튼하게 하며 경맥을 통하게 하고 장기 복용하여도 사람을 마르게 할 염려는 없 다.”고 하였다.

    숙종은 숙종 46년(1720년) 6월 8일(계묘) 승하하였다. 숙 종이 숙종 35년(1709년) 7월부터 숙종 46년(1720년) 6월까 지 복부팽만감, 가슴 답답함, 열기, 갈증의 해소를 위해 녹두 죽을 복용한 기록을 표로 정리해놓았다<Table 5>.

    2)조선 왕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녹두죽의 사용 사례

    (1)인조, 효종, 효순 왕후의 모친,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의 상을 당하여 유가족들이 녹두죽을 복용한 기록

    조선에는 일반 가정집에서도 상을 당한 이웃이나 친척에 게 죽을 쑤어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많은 죽 중에 녹두죽을 먹은 이유는 녹두의 청색이 벽사(벽사)에 사용되었기 때문이 다. 청색은 방위상으로 보아 동방(東方)이며 동방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광명을 표현하기에 청색과 같이 양기가 강한 것 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청색도 적색처럼 인간의 화를 물리치 고 복을 부르는 유용한 색으로 상지되는 것이다(Ahn 2008).

    인조 27년(1649년) 5월 8일(병인)

    午時, 三提調與左相詣熙政堂後庭, 請承言色, 奉菉豆粥一 器, 達曰, 願少進焉.答曰, 奉承中宮殿之命, 飮少許, 差遲飮之. 再達曰, 伏願少進則當退矣.答曰, 飮之未久, 徐當勉副.三達曰, 伏願少進.答曰, 如是勸之, 心甚未安, 强飮少許.

    인조 27년(1649년) 5월 8일(병인) 창덕궁 대조전에서 인조 가 승하하였다. 세자였던 효종은 조선중기 선조 시의 붕당정 치의 시작과 임진왜란, 인조반정, 2차례에 걸친 호란 등으로 인해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재임한 왕이다(Kang et al. 2014). 인조가 승하한 다음날 의관들은 희정당에서 슬픔 에 빠진 당시 세자였던 효종에게 녹두죽 한 그릇을 권하였다.

    효종 10년(1659년) 5월 7일(정묘)

    夕哭後, 三提調, 四殿, 奉慰問安, 仍進菉豆粥一器.答曰, 罔 極, 粥則飮之矣.

    효종 10년(1659년) 5월 4일(갑자) 효종이 승하하였다. 5월 7일(정묘) 석곡(夕哭: 저녁마다 고인의 신주 앞에서 곡을 함) 하는 사전(四殿)에게 녹두죽을 진상하였다는 대목이 보인다.

    영조 10년(1734년) 7월 11일(갑신)

    興慶曰, 嬪宮, 焦煎之餘, 遭夫人之喪, 昨聞醫女所傳之言, 則 菉豆粥少許進御云.

    영조 10년(1734년) 7월 9일(임오) 세자빈 효순왕후의 친모 이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모친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매 우 슬퍼하여 점심을 먹지 않고 수라를 폐하였다. 빈궁의 건 강이 염려되었던 의관들은 7월 11일(갑신) 녹두죽을 진상하 였다.

    영조 52년(1776년) 3월 7일(무인)

    藥房口傳達曰, 臣等伏見邸下, 任情哭泣, 全無所進.且伏念, 中宮殿惠嬪宮哀毁罔極, 必多傷損, 實不勝萬萬焦迫.玆敢奉進 菉豆粥, 抑哀勉進, 仍爲奉勸於中宮殿惠嬪宮, 千萬伏望.答曰, 罔極.昨日已諭, 卿等勿慮焉.中宮殿惠嬪宮當奉勸矣.

    영조 52년(1776년) 3월 5일(병자) 묘시에 경희궁 집경당에 서 영조가 승하한다. 3월 7일(무인)에는 “애훼망극(哀毁罔 極)”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애훼(哀毁)”는 야윌 만큼 부모의 죽음을 몹시 슬퍼한다는 뜻으로, 슬픔에 젖은 중궁전과 빈궁 이었던 혜경궁 홍씨에게 의관들은 녹두죽을 진상하였다.

    순조 즉위년(1800년) 7월 1일(신사)

    藥房口傳達曰, 臣等伏聞邸下, 任情哭泣, 全無所進.且伏念王 大妃殿惠慶宮中宮殿嘉順宮, 哀毁罔極, 必多傷損, 實不勝萬萬 焦迫.玆敢奉進菉豆粥, 抑哀勉進, 仍爲奉勸於王大妃殿惠慶宮 中宮殿嘉順宮, 千萬伏望.答曰, 知道.

    순조 즉위년(1800년) 7월 3일(계미)

    藥房口傳達曰, 連日攀號之餘, 粥飮必無所進, 伏不勝焦迫之 至, 菉豆粥一器, 爲奉進, 勉强以進, 而奉勸于王大妃殿惠慶宮 中宮殿嘉順宮, 千萬伏望.答曰, 知道.

    정조 24년(1800년) 6월 28일(기묘) 조선 22대 임금 정조 가 갑작스럽게 승하한다.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가순궁 은 7월 1일(신사)과 7월 3일(계미)에 각각 녹두죽을 복용하 였다.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에는 “반호(攀號)” 라는 표현이 나온다. “반호(攀號)”는 용의 수염을 더위잡고 울부짖는다는 뜻으로, 임금의 상을 몹시 슬퍼함을 의미한다.

    헌종 즉위년(1834년) 11월 17일(무인)

    藥房口傳達曰, 終日攀號之餘, 粥飮必無所進.伏不勝焦迫之 至, 菉豆粥一器, 玆爲奉進, 勉强以進, 而奉勸于中宮殿世子嬪 宮, 千萬伏望, 敢達.答曰, 知道.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정조의 차남 순조가 즉위하 였다. 순조 즉위년(1800년)부터 순조 4년(1803년)까지는 정 순왕후가 섭정하였고 순조 5년(1804년)부터 순조 27년(1827 년)까지 순조가 친정하였다. 순조의 건강이 악화되자 순조 27년(1827년)부터 총명하였던 아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였다. 순조 30년(1830년) 20대의 어린 나이였던 효 명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순조는 다시 친정을 시작하였다. 순조 34년(1834년) 11월 13일(갑술) 경희궁 희상전에서 순조 가 승하한다. 11월 17일(무인) 순조의 상을 당한 중궁전과 세 자빈궁에게 녹두죽을 진상하였다.

    철종 14년(1863년) 12월 12일(갑신)

    藥房口傳啓曰, 朝者奉進菉豆粥, 不審已有所進乎? 哭泣過 度, 傷損必多, 區區下情, 不勝憂慮, 玆敢更爲封進, 俯勉于王大 妃殿中宮殿, 千萬伏望, 惶恐, 敢啓. 大王大妃殿答曰, 俯勉之 節, 靡不用極, 而中宮殿過度哀毁, 不勝悶迫.

    순조가 승하한 후 순조의 손자인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 로 즉위하였다. 헌종 15년(1849년) 6월 6일(임신) 헌종이 창 덕궁에서 21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철종이 즉위한다. 철종은 철종 14년(1863년) 12월 8일(경진) 승하한다. 12월 12일(갑 신) 대왕 대비전 부터 왕대비전, 대비전에 이르기까지 슬픔 을 감추지 못하여 녹두죽을 복용하였다.

    조선 왕실에서 상을 당하였을 때 유가족들이 슬픔을 이기 지 못해 녹두죽을 복용한 기록을 표로 정리하였다<Table 6>.

    (2)사도세자에게 녹두죽을 진상할지 여부를 의논하는 기록 영조 27년(1751년) 5월 2일(무술)

    菉豆粥, 淸之物矣.米飮亦好, 而士大夫家多用之乎? 晩曰, 閭 閻則嗜食之矣.

    영조 28년(1752년) 4월 10일(신축)

    象漢曰, 豆粥 [綠豆粥] 豆粥, 食後皆有, 而太粥則胃氣蒸結 時亦好, 不足時亦好矣.若魯曰, 冬至冷豆粥, 幼時則頗嗜之矣.

    영조 27년(1751년) 5월 당시 세자였던 사도세자에게 바치 는 물선(物膳:임금과 왕족에게 선물로 바치는 물건)으로 녹 두죽이 어떤지 물어보는 대화가 보인다. “녹두죽은 청량한 음식이다. 미음으로 먹어도 또한 좋다. 사대부에서 많이 사 용하는가?” “녹두죽은 백성들도 즐겨먹는 음식이다.”고 하였 다. 그 다음해 4월 예조판서 상한(象漢)이 말하길 “녹두죽과 두죽은 식사하고 먹으면 전부 몸을 보양해줄 수 있다. 태죽 은 위기를 훈증시키기 때문에 이것도 좋다.”고 하였고 약로 (若魯)는 “동지에 차가운 두죽은 아이들이 자못 좋아 한다.” 라고 하였다.

    당시 10대의 사도세자에게 어떤 죽을 선물로 진상하면 좋 을지에 대해 대관들이 고심해서 의논하였다. 녹두죽은 백성 들도 즐겨먹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이면서 식 사하고 먹으면 보양의 효과도 있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 27년(1751년)과 영조 28년(1752년)에 사도세자가 녹 두죽을 진상 받은 사례를 표로 정리하였다<Table 7>.

    3)녹두죽을 사용한 기타 사례

    (1)영조와 순종이 입맛이 없어 녹두죽을 복용한 기록

    1724년 경종이 승하한 후 영조가 즉위한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경종 독살설이 제기되었고, 경종의 계비였던 선 의왕후는 시동생인 영조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 영조 6년 (1730년) 4월 15일 영조의 침소에 들어가 영조를 암살하기 위 한 시도가 있었으며,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이 암살 미수 사 건을 지시한 인물이 선의왕후라는 의혹이 있다. 지문에는 선 의왕후가 질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암살 미 수 사건 직후 선의왕후의 처소가 어조당에 유폐되고 분개한 선의왕후가 음식을 거부하여 아사한 것이라는 야사가 있다.

    The Annals of Yeongjo (英祖實錄)(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영조 6년(1730년) 4월 16일(계축) 기사 를 보면 “무예별감들이 도둑질을 한 아이 하나를 잡았는데 나이가 어린 환관이었다. 금지된 구역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 은 일찍이 있지 않았던 변고이니, 해당 청(廳)에 내려 법대 로 처단함이 마땅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둑질인지 알았으나 궁궐 담장을 넘어서 화약을 훔쳐 방화 하려고 했던 방화 미수 사건이라는 것이 들통 나 최필웅, 정 수명, 이태건을 국문하고 처참하였다.

    영조 6년(1730년) 4월 25일(임술)

    李光佐進曰, 晝水刺進之乎? 上曰, 戊申以後, 所謂點心, 常 不進矣.近來亦時飮菉豆粥而已, 盡水刺廢, 已久矣.

    영조 6년(1730년) 4월 25일(임술)에는 영조가 점심을 먹지 않고 수라를 폐하였고, 임금의 안위가 걱정되어 의관들이 영 조에게 녹두죽을 진상하는 대목이 나온다. 평소 성품이 예민 하였던 영조가 목숨이 위협 받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은 후 놀란 심신을 달래기 위해 녹두죽을 복용하였으며, 순간적인 충격을 받아 심경(心經)에 열이 몰려 생긴 심열(心熱)을 꺼주 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고종 22년(1885년) 2월 19일(기축)

    弘集曰, 雖有口味之後, 節食最好矣.上曰, 熱氣解散後, 有眩 氣, 何也? 舜澤曰, 元氣虛則眩候易發矣.仍奏曰, 朝夕水刺, 以 何需進御乎? 上曰, 朝夕所食, 是菉豆粥, 而口味姑無矣.

    세자였던 순종이 12세가 되던 겨울, 감기와 체한 증세가 발생하였다. 의관들은 세자에게 홍역의 증세가 보인다고 진 단을 내리고 탕약을 올렸으며, 탕약을 복용한 세자의 병은 점차 호전되었다.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고종 22년(1885년) 1월 26일(병인) 대신들이 세자의 건강이 회복 되어 문안을 올렸다. 고종 22년(1885년) 2월 19일(기축) 세 자가 입맛이 없고 열기가 있으며 어지럼증이 있으므로 열기 를 내리고 위장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녹두죽을 진상하였다. Shinchanbyeokonbang (新撰瘟方)(Ahn SW ed. 2012)에 는 “유행성 전염병으로 열독이 있는 것을 치료하며 삶아서 죽을 쑤어 마신다.”고 되어 있으며, 녹두죽이 유행성 전염병 에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상처를 입은 군사들이 녹두죽을 복용한 기록

    인조 14년(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병자호란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2차 침입이며, 이 전쟁은 이듬해인 인 조 15년(1637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인조 14년(1636년) 12월 25일(을미)

    許啓啓曰, 城上軍被傷者, 率來閭家, 救療事, 傳敎矣.被傷之 軍, 重傷者則不多, 而被傷之人, 甚爲煩憊, 思欲飮酒, 問于醫 官, 則飮酒不可云, 故饋以菉豆粥矣.

    청나라 12만 대군에 맞서 싸운 성벽 위의 군사들이 부상 을 당하였다. 그 해 12월 25일(을미) 군사들은 술을 먹고 싶 어 하였지만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술 대신 녹두죽을 주 었다. 해열제와 진통제가 없었던 조선 시대에 상처가 났을 때 보조적으로 녹두죽을 활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와 순종이 입맛이 잃어 녹두죽을 복용한 사례와 부상 을 당한 군사들에게 녹두죽을 나누어 준 사례는 표에서 확 인할 수 있다<Table 8>.

    IV.요약 및 결론

    우리는 한의학 의서를 토대로 녹두의 성질과 효능을 정리 하였고, 녹두죽을 섭취하였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약효를 추 정해보았다.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를 토대로 17세기 초반 인조 대에서 20세기 초반 순종 대까지 총 168 건의 “녹두죽(菉豆粥)”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였다. 그 다음, 3개의 카테고리 순으로 고찰하였다.

    첫째, 열성 질환에 녹두죽은 활용한 사례는 총 154건이다. 인현왕후와 숙종은 사망에 이르기 직전까지 녹두죽을 섭취 하였다. 목숨이 위태롭고 죽음이 다가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생명이 다하기 직전까지 녹두죽을 끓여 환자에게 떠먹여주 었다는 점은 녹두죽의 의미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거리 이다.

    둘째, 조선 왕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녹두죽의 사례는 총 12건이다. 상중(喪中)에는 녹두죽을 통해 최소한의 영양 을 섭취하여 실신을 방지하였다. 녹두의 청색은 새 생명을 맞이한다는 벽사(邪)의 의미도 가진다. 또한, 사도세자에게 선물로 녹두죽을 진상한 대목도 보인다. 이는 녹두죽이 영양 학적 효능을 넘어 의사학(醫史學)적 가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녹두죽을 사용한 기타 사례는 영조와 순종이 입맛이 없어 복용한 사례와 병자호란에 상처 입은 군사들에 게 녹두죽을 준 사례로 총 3건이다. 녹두죽은 전쟁이라는 다 급한 상황에서 상처가 있을 때 빠른 회복을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본 연구는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에서 녹두 죽이 임상적, 의사학(醫史學)적으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살 펴보았다.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에서는 소화 기 문제가 있을 때, 위중한 질환을 앓았을 때, 전염성 질환 에 걸렸을 때, 상중(喪中)일 때, 스트레스가 심할 때, 상처가 있을 때 등의 경우에 녹두죽을 활용하였다.

    죽을 치료식으로 활용할 경우에는 죽의 주재료가 가지는 한열온량(寒熱溫)의 성질을 파악한 후 환자의 체질에 맞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통제와 향정신성 의약품이 무차 별적으로 남용되고 있는 요즘, 녹두죽을 대체 치료음식으로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앞으로 여러 분야에서 다 양한 관점으로 죽에 관한 많은 연구가 진행 되었으면 한다.

    감사의 글

    This research was supported by a grant from the Korea Institute of Oriental Medicine (Grant No. G16110).

    Figure

    Table

    The number of cases using mung bean porridge (Nokdu-juk) (菉豆粥) in the 「SeungjeongwonIlgi (承政院日記)」

    Major symptoms and application of mung bean porridge (Nokdu-juk) (菉豆粥) for Queen Mother Inmok and its effects

    Major symptoms and application of mung bean porridge (Nokdu-juk) (菉豆粥) for King Injo and King Gyeongjong and its effects

    Major symptoms and application of mung bean porridge (Nokdu-juk) (菉豆粥) for Queen InHyun and its effects

    Major symptoms and application of mung bean porridge (Nokdu-juk) (菉豆粥) for King Sukjong and its effects

    Major symptoms and application of mung bean porridge (Nokdu-juk) (菉豆粥) for the bereaved family and its effects

    Major symptoms and application of mung bean porridge (Nokdu-juk) (菉豆粥) for Prince Sado and its effects

    Major symptoms and application of mung bean porridge (Nokdu-juk) (菉豆粥) for others and its 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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